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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얌 Apr 30. 2022

밝은 곳에서 춤을 춰야 하는 이유

우리춤의 매력

복지 회관 울타리에 듬성듬성 서 있는 목련나무. 가지마다 언제 털 봉오리가 고개를 들었는지, 이른 아침, 예랑 찻집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사진을 보면서 차를 나누고 있다. 며칠 전 「우리춤」 공연 때 찍은 춘향, 도령복에 어사모까지 쓴 화사한 모습의 사진이다.


내가 눈(雪) 길 속에 복지 회관에 출퇴근 한지도 어느새 20여 일, 오전엔 치매노인 돌보미 봉사( 졸업을 위한 72시간)로, 오후엔 내 또래 노인들과 춤 수강으로 하루하루는 바쁘게 지나갔다.




봉사를 하러 온 첫날, 「노들강변 」 노랫가락이 들려오는 3층으로 가니, 대여섯 명의 수강생들이 춤 연습에 한창이었다.


노들강변 봄바람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서 매어나 볼까.


노랫가락에 흥이 난 나는 문을 열고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가서 춤을 췄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눈치 채지 못했다.


삼십 분 동안 연습을 마친 간식 시간, 그들은 내게 요구르트 한 병을 건넸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춤을 잘 추시네요, 추신지 오래되셨나요?”라고 물었다. 반장 할아버지는 “한 일 년 정도 되었어요.”라고 말씀하시면서 수강 발표가 한 달 남짓 남아서 춤 연습을 서두른다고 했다. 나더러 춤에 관심이 있으면 동아리에 들어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네! 네!라고 대답은 했지만 조금은 머쓱하며 걱정스러웠다. 휴식 시간 후 선생님이 내게 “뒤에서 춤추는 것을 보니 춤을 잘 추시던데요,”라고 권했고, 나도 취미 생활을 찾던 중이라 반가웠다. 그때부터 동아리의 일원이 되면서 우리 춤은 내 삶의 의미가 되었다.


매일 오후 강의실은  시끌벅적하다. 춘향이며 이도령 옷을 입으면 팔순 노인도 어느새 이팔청춘의 복사꽃 빛으로 물든다. 어사모까지 쓴 '이도령들'은 장원 급제의 영광에 표정까지 달라진다. 노들강변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팔들이 등나무 줄기처럼 꼬여서 빙빙 돌고, 이때 살짝살짝 스치는 얼굴들은 오작교 앞에 선 견우직녀를 닮았다. 일 년을 기다려온 애달픔이 절로 이해된다. 춘향과 이도령의 순정을 담은 표현은 이 춤의 백미이다.


평생을 가족과 회사를 위해 살아온 우리 세대들에게 이런 '유희'는 단순한 '춤'을 넘어 생에 처음으로 하는 '예술'이다.




이제야 어릴 적 큰딸이 그토록 '한국무용'을 좋아하던 마음이 이해된다.


어릴 적 성당에서 크리스마스 공연을 본 뒤, 초등학교 3학년이던 딸은 학교 무용반을 찾아갔다. 학교에서는 방과 후에는 무용 학원에 아이들이 가도록 했다.  딸은 밤 늦도록 무용 연습을 해야 했지만 성적은 늘 유지해 우리를 안심시켰다.


우리는 아이의 학원비와 슈즈 비용 외엔 지원을 더 해주지 않았다. 잠시 할 취미라 생각해서였다. 지방 소도시였고 당시 풍토 상 무용용품도 비싼데다 학교와 학원 선생님들이 요구하는 고액의 작품비는 웬만한 가정의 몇 달치 수입과 맞먹었다. 해서 딸은 늘 대회가 아닌 자선 공연에만 나갔고 선배들의 의상을 빌려 입곤 했다.


그러기를 몇 년, 딸에게 선생님들이 무용과 진학을 추천했고 딸 역시 열망했다. 나는 딸을 가정 사정이 어렵다는 핑계로 말렸다. 사는 데 급급했던 이 어미는 ‘춤’을 하나의 기예로만 알고 감히 예술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부모인 우리는 돈을 벌 테니 너는 공부해서 '꽃길'을 가거라. 그런 생각에 '무용과'를 가겠다던 큰딸에게 공부만을 강요했었다.


어느 날 딸의 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방에 들어가 보니 이불속에서 부모에게 들릴까 봐 숨 죽여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를 나는 못 들은 척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그것이 딸을 위한 부모의 리라고만 생각했기에....




세월이 흘러 큰딸은 갈망하던 ‘춤’을 취미로 꾸준히 배웠고 무대에도 종종 서게 되었다. 처음으로 딸이 춤을 추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나 역시 복지관 봉사를 갔다 접한 뒤 ‘우리춤’을 배웠다. 비로소 딸이 한국무용을 사랑했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딸과 '춤'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 '우리춤'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어느 새 내게 ‘우리춤’은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작은 행복이 되었다. 매일 서투른 손, 몸동작을 곁눈질로 훔쳤고, 차츰 아마추어는 면해갔다. 어느 날 밤, 잠꼬대로 ‘노들강변’을 흥얼거리다 남편에게 핀잔도 받았다.


논어의 유명한 구절이 떠오른다.


“자왈: 지지자는 불 여호 지자 오 호 지자는 불 여락 지자니라(子曰: 知之者는 不如好之者 오 好之者는 不如樂之者니라).”라는 구절에서.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라는 성인의 말을 떠올려 보았다.




며칠 전 TV에, 북경의 길거리에서 남녀노소가 어우러져 ‘춤’을 추는 모습을 보았다. 춤추는 여자를 편치 않은 눈으로 바라보던 우리 세대였다. 딸의 꿈을 말린 것도 그런 선입관 때문이었다.


K-POP이 글로벌 문화가 된 시대. '우리춤'도 더는 여자의 '팔자를 사납게 하는 잡기'가 아니다. 춤은 남녀노소의 문화가 되었다. 춤! 누구나 밝은 곳에서 오래도록 출 수 있는 아름다운 것. 우리나라도 중국이나 브라질처럼 남녀노소 거리에서 춤을 추며 '살아있음'을 즐거워할 수 있기를 바란다.


표제 이미지: 픽사베이



글쓰는 할머니, 구하나

: 손자들을 키우러 상경했다 60에 여고 입학, 70에 국문과에 입학, 팔십대인 지금까지 팔팔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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