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딸의 전시회 날, 꽃다발을 사서 인사동의 한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름다운 색깔의 그림들 앞에 서니 황홀한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때 옆에서 나를 눈짓하며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화는 저렇게 바짝 붙어서 보면 안 되는데...."
얼른 몇 발짝 뒤로 물러섰지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 친구가 딸과 함께 전시장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꽃다발을 건네면서 친구 딸에게 “축하해요”라고 했다. 친구의 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첫 전시회라 저 너무너무 떨리는 거 있죠."
우리는 함께 갤러리 안을 천천히 거닐며 그림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그림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조금 전 손님들이 하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림에 대해 어떻게 감상을 말해야 할 지 고민하다 툭 내뱉은 게 고작 이 말이었다.
“딸이 고생했네.”.
서툰 내 칭찬에 비해 친구는 화가인 자신의 딸 보다 더 그림에 대해 많이 얘기했다.
"이 그림은 배경 처리가 시원시원하고 저 그림은 원근 처리가 잘 됐지." 등.
나는 웃었다.
“딸이 화가라 그런지 어머니도 그림 설명을 잘 하네.”
미소를 지었지만 실은 어서 전시장을 떠나고 싶어졌다. 친구 모녀의 삶은 왠지 내 삶과 달라 보였다.
결혼 후 내 삶은 늘 삼남매를 키우며 남편과 맞벌이를 하며 살았다. 그림, 화가, 예술. 나와는 동떨어진 것일수록 한없이 높고 멋지게만 보여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오는 지하철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예술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답은 없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든 멀리 가서 보든, 한 그림을 다른 그림보다 오래 보든, 남과는 다른 방식으로 감상을 하든, 뭐가 다른가 싶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밤새 그림 생각으로 잠을 설쳤다. 전시장에서의 시선과 속삭임 때문에 부끄러웠다가 분했다가 슬펐고 두 번 다시 오늘과 같은 일은 겪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다음 날 잠을 못 자 피곤한 얼굴로 시내의 한 미술학원 문을 노크했다. 중년의 서글서글한 눈매의 남자 선생님이 인사를 했다.
“늦은 나이에도 그림을 그릴 수 있나요?”
내 질문에 선생님께서 은은하게 웃으셨다.
“그럼요 어머니, 그림은 나이가 중요 안 합니다. 더 늦은 나이에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여름방학이라 크고 작은 학생들과 성인들이 많이 나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서툰 걸음으로 학생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섰다.
화실에 간 첫날 단합대회 자리. 모두들 넓적한 옹기에 바가지까지 두둥실 띄어 막걸리를 한 바가지씩 철철 넘치게 부었다. 반장이 선창으로 ‘반’ 하면 회원들은 후창으로 ‘고흐’하면서 동아리 이름을 외쳤다.
그 해 여름, 내 인생 처음으로 가장 크고 화사한 웃음꽃이 가득 피어났다. 오십여 년 인생에서 처음 맞는, '노란 해바라기의 계절'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데생을 먼저 좀 배워야 한다면서 미술 연필과 스케치북을 건네주셨다. 오랜만에 종이와 연필을 대하니, 어린 시절의 상처 하나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였다. 숙제로 칸 잡이 노트에 기역 자를 침을 묻혀서 몇 장씩 써서 학교에 가져갔다. 선생님은 글씨를 비뚤비뚤하게 쓴 내 숙제 노트를 애들 앞에 공개하셨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역시 숙제도 잘 해 온다."
애들 앞에 내 노트를 펼치면서 글씨는 또박또박 이렇게 써야 한다고 칭찬을 했다. 그날은 내 글씨가 최고인 줄 알았다.
내가 악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4학년이 되어서였다. 문예반 선생님께서 내가 써낸 작문을 보고 “글씨가 이게 뭐야 일 학년만도 못하다.” 하셨다. 그러고는 반 친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글씨와 글짓기도 기본이 되어야 한다. 글씨는 얼굴이다."
그날, 집에 오는 십 리 길 내내 흙길 위로 눈물이 흘렀다. 눈물범벅이 된 나를 본 엄마는 왜 그러냐며 달래셨고 자초지종 내 말을 들은 아버지께서는 칸 공책을 사 오셨다. 나는 그 공책에 '가나다'부터 하루 한 장씩 쓰기 시작했다. 그 뒤로 글씨는 다행히 악필을 면하게 되었다.
어릴 적 일이 떠오르자 글씨처럼 그림도 바탕부터 탄탄하게 차분히 다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의 기본은 데생이다!'
이젤에 앉아 가로선 긋기를 두서너 시간하고 나니 선생님께서 이제 됐다면서 다음날은 세로 긋기를 시켰다.
일주일이 지나자, 이제 유화로 들어가도 되겠다고 말씀하셨다. 유화를 시작한다는 기쁨에 이제 초보 딱지를 뗀 것처럼 우쭐해졌다.
비상금을 탈탈 털어 화방에서 제일 좋다는 외제 유화물감을 사서 화실로 향했다. 성인 반 학생들이 “어머니 초보인데 이렇게 비싼 물감을 쓰면 안 돼요."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 말에 다시 밤잠을 설쳤다. ‘이 나이에 무슨 미술이야. 미대를 갈 것도 화가가 될 것도 아닌데 비싼 물감은 왜 사가지고 창피를 당하나.’
초보의 '오버'가 부끄러워 화실을 가기가 민망했다. 그러기를 일주일. 연필 소리와 물감 냄새가 너무 그리웠던 나는 용기를 내어 살그머니 화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머니 많이 아프셨어요?”
"데생하시는 걸 보니 앞으로 잘 그리시겠어요!"
모두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따뜻한 말들에 나는 아이처럼 다시 기분이 좋아지고 의욕이 생겼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화가’라는 단어를 써 붙였다. 학원에서 집으로 오면 그날 배운 그림 이론과 실습 때 물감 혼합했던 과정을 꼼꼼히 연습장에 기록했고 일기도 열심히 썼다.
미술수업을 시작한 지 삼 개월, 교실 창밖 앞바다에는 코발트블루, 울트라 마린 디프로 그라데이션의 파도가 실뱀처럼 흔들거렸다. 바다는 보이지 않고 물감만 눈에 들어왔다. ‘언제쯤이면 저런 천연색을 물감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깨달았다.
'아! 이제야 그림을 제대로 배워나가고 있구나!'
코끝을 스치는 간간 짭짤한 갯내음은 무슨 색깔일까 궁금해졌다. 보이지 않는 것도 색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비좁은 공간, 머리와 등에는 땀이 스멀스멀 타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그림에 몰두했다.
남의 그림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 시간들이 지나자, 이제는 조금씩 남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그림 흉내도 내게 되었다. 그런 내게 누군가가 재밌다는 듯 농담을 했다.
“화가님은 이태리에서 언제 오셨어요? 조금만 더 있다 오시지."
"그럴걸 그랬나? 어쩌겠어. 그놈의 생활비 때문에 이태리에 더 못 있겠더라고.”
하하 호호 하며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하루해가 수평선으로 내려앉았다. 수업이 끝나면 우리는 진짜 그림쟁이 마냥 군데군데 유화물감이 묻은 옷을 입고 뒤풀이로 향했다. 주꾸미 무침에 충무 김밥 그리고 막걸리 한 잔,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나는 가게로 다시 돌아갈 때의 내 발걸음은 파리지앤느의 리듬이었다. 가게의 하루를 정리하고 다시 장을 봐 집으로 가는 언덕길에 접어든다. 잠시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앞치마를 두르고 서둘러 저녁을 지어야 하고 또 설거지에 청소를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림을 그렸고 내일도 그림을 그릴 것이다. 집으로 가는 언덕, 내 기분은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으로 향하듯 달콤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