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당신을 닮은 보리수 아래에 기대선 채 세상을 떠나셨다.
담장 너머로 백목련 나뭇가지마다 탐스러운 털 봉오리들이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 모습을 찍으려고 사진기를 요리조리 비틀면서 안간힘을 쓰는 한 남자를 보았다. 행여 방해될까 조심스레 그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건넸다.
“좋은 취미를 가지셨네요, 벌써 목련이 피려나 봐요.”
“네, 겨울인데 요즘 꽃은 철도 몰라요.”
목련꽃 대화 속에 우리 행운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우리 동네 노인회장님, 정해문씨. 오륙 년 전 내가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사를 와서 처음으로 친구가 된 분이다. 언젠가 미숙한 내 수필을 몇 편 드렸는데 꼼꼼히 읽으시고 답글과 함께 평까지 해주면서 유머 넘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번은 실버대학에서 회장님이 내 글을 인쇄해서 오십여 명의 학생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읽었다. 생각지도 않은 깜짝 이벤트에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공직 생활 사십 년을 마치신 회장님은 다재다능한 멋쟁이다. 노구에도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을 신약 구약 합쳐 66권을 완필해서 CBS 방송국 개국 60주년 기념 한국교회 성경 필사본 전시회에 출품했다. 그 투철하신 종교관은 내게 더 매력으로 다가온다. 하루하루 이웃에게 덕을 실천하는 그분을 보면서 나 역시 몸소 따를 수는 없지만, 조금씩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마음속 향기를 품으면서 나를 독려한다.
늘 만면에 웃음을 띤 온화한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는 회장님은 경로당 회원들은 물론 이웃 지인들의 병문안부터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후학을 덕으로 몸소 실행한다. 경로당을 빙 둘러치고 있는 무궁화도 손수 심었다.
방학이면 충효‧ 한자교실에서 초‧중‧고교 학생들을 가르친다. 한자급수를 따는 학생에게는 상장과 장학금까지 주며 공부를 장려한다. 심지어 술을 드신 뒷날도 힘든 몸을 추슬러 아침 9시에는 분필을 잡는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상태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뛰어난 창조력, 불타는 정열
비겁함과 나약함을 떨쳐버릴 수 있는 용맹성
안이함을 뿌리치고 모험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상태를 '청춘'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기 때문에 늙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상을 상실했을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살갗에 주름을 만들 뿐이지만
정열을 상실했을 때 정신은 폐물이 된다
사무엘 울만의 시이다. 시인이 이 분을 만난다면 기뻐할 것이다. 시인의 시를 온전히 살려내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니 말이다.
회장님은 십삼 년간 중병에 걸린 아내를 잘 간호했고, 그때 매일 밥을 씹어 어머니 입에 넣어드리며 효심을 실천한 막내아들을 먼저 보내고도 꺼지지 않은 열정은 놀랍고 아름답다. 오히려 위로받아야 할지도 모를 그분이 무슨 힘으로 남들을 위해 봉사하고 삶에 대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을까.
우범지대 순찰과 학생들 등‧등‧하굣길에 보안관의 봉사를 하다 보면 하루 시간이 짧아 아쉽다는 한결같은 청춘, 그분의 삶이 나의 멘토가 된다.
동네 한 바퀴를 돌다 보면 산책을 나온 그분과 마주칠 때가 많다.
어느 저녁 늦은 시간 조그만 가게 앞에서 어묵과 옥수수를 잔뜩 사고 있던 그분과 마주쳤다.
"혼자 사시면서 왜 그렇게 많이 장을 보셨어요?"
내 질문에 정회장님은 미소를 지었다.
"가게 주인이 요즘 사는 게 힘들다고 들었어요. 이렇게라도 해줘야 제 마음이 편해서요."
가게 문이 닫힌 날은 주인에게 무슨 변고라도 있는지 노심초사 살피기도 한다 했다. 섬세한 그 마음은 샘물처럼 흘러흘러 때로는 내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운다. 물론 외롭고 힘든 누군가의 가슴에도 흠뻑 가닿기도 하겠지.
이웃에게 나눌 수 있음을 보람이라고 말하는 그분의 인생. 늘 푸른 상록수처럼 멋지다. 마을 어귀마다 우뚝 서 있는 수호신 나무 같다. 정회장님의 삶을 보며 '성문 앞 우물 곁 보리수'가 절로 떠오른다. 그래, 이 분은 '우리 동네 보리수'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함께 했던 보리수. 우리 동네 보리수 앞을 지나갈 때면 그 보리수를 즐겨 사진 찍는, 역시 보리수를 닮은 정회장님을 떠올린다. '삶의 태도'를 생각하게 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 짧은 글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그분의 고고한 인품과 향기가 우리 동네 골목골목 스며들어 오래오래 샘물처럼 흐르기를 바란다.
* 이 글을 쓴 다음 해, 정회장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담벼락에 의식을 잃고 기대서 있는 정회장님을 발견한 날, 나는 급히 구급대를 불렀다. 자신이 즐겨 찍던, 자신을 닮은 보리수 아래에 기대 선 채 돌아가셨다. 팔순을 넘긴 나 역시 언제 어떤 모습으로 떠날 지 모른다. 정회장님처럼 나도 '한 그루의 나무'나 '풀'처럼 의연히 살다 가고싶다.
표제 및 본문 이미지: 픽사베이, dae jeung kim
글쓰는 할머니, 구하나
: 손자들을 키우러 상경했다 60에 여고 입학, 70에 국문과에 입학, 팔십대인 지금까지 팔팔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