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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얌 Sep 16. 2022

이 따스하고 아름다운 인연

의자매가 된 우리는 흐린 날도 맑은 날도 함께했다.



오늘은 동문 모임에 가서 '순자 언니'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다. 일찍 고향에 도착한 나는 홀로 시간의 창가에 비친 고향 바다를 감상 중이다. 언니의 세 번째 전화를 받고나자 찻잔에서 하얀 하트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 같다.


  "복화(어릴 적 내 이름)야, 끝마치고 바로 와."


좀 전 전화에 대고 따뜻하게 말하던 언니의 음성이 커피의 여운처럼 향긋하다.


나보다 두 살 위인 그녀는 나와 피를 나눈 친 자매가 아니다. 하지만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남이라고 생각한 적 없으니 이 따스하고 아름다운 인연의 이름은 ‘의자매’이다.




백여 가호인 민양 마을. 순자 언니는 이곳에서 부유한 방앗간 집 외동딸로 자랐다. 형편도 넉넉했지만 공부도 곧잘 했던 순자 언니는 어려운 시절 동네에서 유일하게 여고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언니의 집은 옛날엔 위채는 기와지붕, 아래채는 까만 도단 지붕이었고서 지금은 빨간 벽돌집으로 새 단장을 했다. 태어나 자란 집에서 마음 좋고 인물 좋은 엘리트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당시 시골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온 커플은 드물었기에 이들 부부는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찻집을 나온 나는 몇십 년 회포를 풀기 위해 택시를 타고 민양 고개를 넘는다. 동네 끝 가까이 빨간 벽돌집이 보인다. 근처 나의 옛집 초가도 아련하다.


산천이 일곱 번이나 바뀌었어도 여전히 저 푸른 물결처럼 변치 않고 기다리는 고향 같은 그녀, 여태껏 나에게 마음을 다 퍼주고 밑동만 남은 나목 같은 사람이다. 둘만의 추억을 아는지 오늘따라 동네 뒷산에서 거꾸웅 거꾸웅 하는 산꿩 울음이 정겹다. 팔순이 넘은 나이지만 언니를 생각할 때면 동심으로 돌아간다.




순자 언니에게,

언니! 오늘 밤은 동심으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을 타고 싶어요.

꼬마선(조각배)에 올라 신나게 노를 저어 물오리들과 놀았던 것처럼 말이죠.

생각만 해도 야호! 정말 신나요, 언니.


어릴 적 친구들과 노(櫓)를 저으며 마을 앞바다 한 바퀴를 빙 돌 때, 질피며 파래랑 미역을 건졌지요.

그리고 파도가 칠 때마다 굵은 봄 멸치 떼가 바위에 벌렁 누워 은빛 배를 내밀면서 파닥파닥 뒹굴었지요.

바닷물이 치마폭처럼 찰싹거리는 널따란 바위에서 우리는 멸치를 한 움큼씩 잡아 치마폭에 담았어요.


그 신나던 언니와 나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네요.

오늘 밤도 고향 앞바다엔 그 파란 물고기들이 잡힐까요?


산천이 일곱 번씩이나 바뀐 둘만의 별빛 이야기는 오늘 언니와 나의 하룻밤 포근한 잠 속에 하늘에서 날개를 달 거예요, 둘이 마냥 좋았던 그때처럼.


마침 지금 막 언니와 저의 첫 만남으로 우리를 데려갈 타임머신이 도착했네요!

어서 타요 함께.

신이 나요!

동화 같은 우리 둘의 특별한 사연이 하얀 지면 위에서 춤추려 해요.


언니! 생각나는지요?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방축 밑에 고양이처럼 수줍게 앉아 있던 나를....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언니는 여덟, 나는 여섯 살이었지요.


  "너 어디서 이사 왔어?”


언니는 먼저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지요.

나는 부끄러워 대답도 못하고 눈물이 핑 돌았어요.

그때 언니는 "우리 집에 가서 나랑 놀자!" 하면서 내 팔을 끌었어요.


그날로 나는 언니 집이 우리 집보다 더 좋았어요.

친자매처럼 살가웠던 두 살 위인 언니가 좋아 눈만 뜨면 언니 집으로 달려가 앞뒤 마당에서 온종일 놀았지요.

언니 조부모님들 역시 나를 친 손녀, 손녀, 딸처럼 반겼어요.

어머니는 "복화 복화야!" 하면서 내 이름늘 두 번씩 정답게 불러주었어요.

둘이 마루에서 다리를 흔들면서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을 때면 스르릉, 가마솥 뚜껑을 여는 소리가 들렸어요.

잠시 후 순자 언니 어머니께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 고구마와 옥수수를 양푼에 담아 내오셨죠.


 "어서 먹어."


하고 환히 웃으시던 모습은 고구마와 옥수수보다 더 따뜻해 보이셨고요.


돌담장 밑에 바닷물이 찰랑찰랑할 때였어요.


 “언니 수영하자”

 "그래. 너 먼저 해."

 “나 옷 벗고 들어갈게.”라고 하면서


수영복도 없던 시절, 속옷만 입은 나는 방축 끝에서 풍덩!

잠시 후 언니도 물속으로 풍덩.

여름바다는 둘만의 수영장이 됐지요.


언니! 생각나세요?

언니가 내게 처음, “복화야, 우리 의자매 맺을까?”라고 하던 날을요.

내가 "의자매가 뭔데?"라고 하자

언니는 말했죠.


"우리 둘이 함께 먹실로 팔에 문신을 하면 영원한 자매가 된다!"

라고요.


어린 내가 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언니는 덧붙여 말해줬지요.


"이제부터 너와 나는 친자매와 마찬가지다."


말귀도 못 알아듣는 어린 나에게 그렇게 거듭거듭 말했지요.

그러고는 집으로 달려가서 하얀 실에 먹물을 묻혀서 둘의 팔뚝에 똑같이 문신을 했지요.

나는 아팠지만 자매가 된다는 말에 눈물을 참았지요.




그녀의 집 마당에는 토종닭들이 이리저리 홰를 치고, 개 두 마리 중 한 놈은 방앗간 앞에서 손님을 마중하고, 한 놈은 큰 대문 앞에서 손님들을 일일이 점검했다. 방앗간을 돌아 마당 구석엔 큰 황소가 송아지와 여물을 먹다 말고 하품을 하면서 누워 있었다. 근처 염소 막장에는 서너 마리 염소가 번질거리는 까만 털을 자랑하고 노란 눈알을 굴리며 나를 바라보는 것이 말 그대로 동물농장이었다.


그 집에서 삼백 미터 가량 떨어진 우리 집은 마을 끝에서 두 번째로 흙담 두 칸 초가였다. 작은 집에서 여러 식구와 복닥대고 살던 내게, 넓은 마당에 동물들이 매애매애, 꽥꽥, 음메 하는 그 집은 별천지였다. 친자식 친손녀처럼 또 반겨주시던 집안 어르신들도 마냥 좋았다.




마을의 하나뿐인 방앗간이었던 언니 집은 명절이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남자들은 지게로 곡식을 지고, 여자들은 곡식 자루를 이고 왔다. 오리 혹은 십리 길을 걸어, 두서너 고개를 넘어오기도 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이 명절 떡가루를 부술 때 방앗간은 만남의 사랑방이었고 정담의 장소였다.


많은 곡식 자루, 그릇, 사람들이 온종일 기다린다. 여덟 마을 사람들은 덕석을 깔고 지루함을 달래려고 막걸리를 마신다. 이런 날 그녀 집 방앗간은 잔치마당으로 바뀐다.




순자 언니가 도시에 신혼살림을 차린 삼사 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신혼집 구경도 할 겸 그녀 집에 갔었다. 아담하고 예쁜 집으로 가게가 달린 집이었다. 가게에는 여러 가지 잡화품들이 즐비했다. 그녀는 ‘도시 생활도 장사도 내겐 맞지 않아.' 하면서 부모님이 농사짓던 고향으로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시골은 일이 많아서 힘들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언니 부부가 마을에서 해낸 크고 작은 일들을 보며 나는 그녀의 참뜻을 이해했다.


언니가 고향으로 돌아간 이유는 도시가 싫었서가 아니었다.
고향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순자 언니는 동네 부녀 회장직을 삼십여 년이나 맡았다. 군청, 시청으로 매일 드나들며 남자도 하기 어려운 크고 작고 어려운 일은 모두 처리했다. 온 동네 분들이 그녀를 존경했고, 그녀 또한 고향을 위해선 한없는 열정을 쏟았다.


언니 부부는 고향 앞바다 청정 해역에 멍게·굴 양식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집집마다 양식장을 차리며 마을은 빈촌에서 부촌(富村)으로 변했다.
그녀 부부의 리더십이 햇볕처럼 민양마을에 퍼져갔다.




때때 굴 굴러 나왔지 무엇이 굴러 나왔나

할배 주머니 속에서 밤 한 톨이 굴러 나왔지

무엇을 할까 구워 먹을까 어디서 구울까

숯불에 굽지 호호 불어서 너하고 나하고 알콩달콩

아무도 모르게 먹지 쉬쉬 떠들지 마라

우리 할배 낮잠 깨실라


당산 밑 언덕 잔디밭, 염소가 풀을 뜯고 있을 때면  따스한 햇볕 아래 둘이 나란히 누워 부르던 노래다. 서울로 떠난 내게 이 노래는 부르기만 해도 절로 안식을 줬다. 고향이 그립고 그녀가 보고 싶을 때 전화를 하면 삶에 지친 나를 보듬어주는 말.


 “이것아! 전화 좀 자주 해라."




어릴 적 그녀와 함께 잠잘 때, 양철지붕 위에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 소리는 툭툭 투두둑 또르르 똑똑하며 굴렀다.

그 소리에 잠자는 그녀를 흔들며 잠 섞인 목소리로 묻곤 했다.


"언니, 자? 비가 오나 봐. 비설거지할 거 없어?"


내가 집 걱정을 할 때마다 그녀는


"걱정 그만하고 자자. 조금만 자면 날이 샐 거야. 그때 생각해도 돼."


라며 나의 등을 토닥여 재워주곤 했다.




언젠가 우리 둘은 '겨울밤의 해'를 보러 갔다. '겨울밤의 해'란 '횃불'을 말한다. 왕시(물의 간만의 차가 심할 때) 저녁, 막대 끝에 솜을 뭉쳐 철사로 감아서 석유에 담갔던 횃불을 들고 바닷물이 완전히 빠지는 밤 시간에 둘은 바지를 무릎까지 올렸다. 순자 언니는 횃불을 들고 앞서고 나는 바구니를 들고 뒤따라갔다. 인기척에 놀란 주꾸미, 낙지, 호리기가 먹물을 픽픽 싸며 달아났다. 그녀는 그럴 때 갈고리로 잽싸게 낙지를 잡고 또 살금살금 다가가서 손으로 꽃게 등을 꾹 눌렀다. 해삼, 고동도 많이 잡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 잡아온 해물들을 솥에 삶아 아침이면 이웃 친구들과 맛있게 먹었다. 그녀는 외동딸인데도 남에게 베풀고 인정이 많아서 언제나 주위엔 어른들과 친구가 많았다.




순자 언니와 나는 생사고락을 같이 한 적도 있었다.


한국 전쟁 때였다. 온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간다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초등학생이던 우리는 마을 사람들이 혼비백산해 달아나는 동안 큰 나무 뒤에 꼼짝도 않고 숨어있다 살그머니 나왔다. 그길로 우리는 목 넘어 동굴 속에 숨었다.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얽은 문틈으로 내다보니 갈목 고개를 넘던 빨갱이 칠팔 명이 보였다. 그들은 모자를 쓰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언니가 내게 속삭였다.


"복화야, 빨갱이는 얼굴이 빨갛다던데."


그 말에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던 우리는 철없이 웃었다. 그러다 둘 다 웃음이 싹 가셨다. 미처 피하지 못한 마을 사람들을 향해 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우리는 동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귀를 막고 있었다.


'빨갱이'라고 말한 자들을 본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늘엔 비행기 소리가 들렸고 고성에서 통영으로 넘어오는 저만치 원문 고개에선 폭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치솟았다.




아버지는 피난을 가려고 하루 종일 나를 찾았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 가족보다도 의형제인 순자 언니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 아버지는 서두르자며 우리 가족을 고깃배에 싣고 섬으로 떠나셨다.





섬에 도착하자 이미 와있던 도시 사람들이 바닷가에 천막을 치고 있었다. 가장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이었다. 오랜 시간을 걸어걸어온 그들은 식량이 바닥나 마을 담장에 기어 다니는 구렁이를 잡아 구워 먹었다.


우리도 인민군에게 식량을 다 뺏긴 뒤라 소나무 껍질을 벗겨 송진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어느 밤, 막내 남동생이 시름시름 앓다 눈을 감았다. 엄마는 내게 동생을 업히셨다. 나와 엄마는 한밤중 아무도 모를 곳에 동생을 묻어주고 피난민촌으로 다시 돌아왔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와 순자 언니와 재회했을 때의 기쁨이란! 언니네는 고향에 남아있었는데 다행히 인민군이 빨리 퇴각해 그나마 고생을 덜했다 했다. 다시 평화가 찾아왔고 순자 언니와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우리는 하교 길에 갑자기 불어온 센 비바람에 떠밀려 바다 쪽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다행히 우리는 해안의 방축 끝에 박아놓은 말뚝에 매달려 살 수 있었다. 언니는 나를 찾아 물 위로 끌어내었고 우리는 눈물범벅인 채로 마을로 돌아왔다.


잊을 수 없는 일은 또 있다. 어려운 시절, 그녀가 우리 집 빈 쌀통을 열어보고 자기 집 쌀을 퍼 와 쌀통에 담아 놓고 갔던 일이다. 우리는 그 일에 대해 여태껏 서로 묻지도 말하지도 않고 있다. 말없이 쌀을 주고 간 언니, 그게 언니가 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여태 가슴에만 묻어뒀던 나. 꼭꼭 숨겨 아꼈던 말을 이제야 꺼내려한다.


언니!

의자매라는 인연, 그 인연이란 게 이렇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말인가요?

눈물이 나네요.

언니! 나의 생에 늘 함께 해줘서 고맙습니다.

                    


이미지 출처


표제: 픽사베이,  Waldryano

본문 1: 픽사베이,   OpenClipart-Vectors

본문 2: 픽사베이, Alexa 

본문 3: 픽사베이, Robert Waghorn

본문 4: 픽사베이,  Pe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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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할머니, 구하나

: 손자들을 키우러 상경했다 60에 여고 입학, 70에 국문과에 입학, 팔십대인 지금까지 팔팔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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