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힘을 열림으로, 딱딱함을 부드러움으로, 노년을 청년으로
책장 한편에 오랜 시간 꽂힌 채 내 손길을 기다려온 책이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이다. 책을 펼쳐 읽던 중 ‘노래의 힘’이라는 장에 눈이 머물렀다. '글이 없던 시절, 노래는 어떤 힘을 가졌을까?' 문득 작년 봄 ‘주문진 오죽헌’ 관광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트로트로 편곡한 곡이 울리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숨을 고르며 뒷좌석에 앉았다.
앞뒤를 보았지만 지인이 한 분도 없는 초면이라 서먹하면서도 편한 감도 있었다. 우리 부부는 조심조심 앞 뒤 옆 노부부들의 표정을 살폈다. 모처럼 집 밖으로 나왔다는 홀가분함을 즐기는지 모두들 조용히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만끽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올 즈음이면 이 서먹함도, 닫힌 마음도, 저절로 열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플래카드를 둘러친 관광버스가 출발했다. 봄비가 버스를 치며 내리는 소리가 마치 "잘 다녀오세요!" 하는 박수와 환호 같다. 창밖으로 스치는 빗속의 풍광, 희미한 신록의 밭고랑 사이로 푸성귀들이 꼼지락거리는 폼, 수직으로 고고히 서 있는 소나무들의 솔방울도 신난 것 같은 희부연한 점점들…….
울긋불긋 등산복에 모자, 신발, 가방까지 세팅한 어르신들, 금세 노년의 화원으로 바뀐 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방 기기 때문인지 모두 신나는 표정들이다. 집에서 벗어났다는 자유로움에 우리 부부의 맞잡은 손도 첫 휴가로 만난 연인처럼 설렜다. 박목월 시인의 시 속에서 뛰노는 청 노루가 된 느낌이었다. 모처럼 친정 나들이를 한 신부가 된 할머니, 새신랑이 된 할아버지처럼, 남녀노소 희희낙락(喜喜樂樂) 버스 안이 술렁거렸다.
삼십여 분이 지난 후, 우리는 봉사자로부터 떡 · 과일 ‧ 음료가 든 큼지막한 비닐봉지를 받았다. 각자 앞섶에 파란 리본까지 달아주면서 봉사자는 당부했다. ‘휴게소에서 화장실 다녀오기 신호등 지켜 길 건너기’ 등, 여러 가지 주위 사항도 당부했다. 나는 어느새 이렇게 ‘길 찾는 어려움’까지 조언을 들을 나이가 되었다 싶었다. 다른 한 편으로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 하고 살아왔던 세월이 아련히 떠올랐다. 자식들처럼 자상하게 챙겨주는 봉사자들이 고마웠다.
여행의 가이드인 자원봉사자가 여행의 주제는 “2015년 얼과 유래를 찾아 떠나는 평생학습”이라고 했다. 앞 좌석의 여든이 훨씬 넘은 할아버지는 그 말을 놓쳤는지 뒷자리의 우리를 궁금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얼른 나는 메모지에 글을 써서 보여주었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안심과 고마움이 섞인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원도 주문진을 거쳐 경포대까지의 시간은 약 네 시간, 도중에 휴게소에 닿았다. 커피도 나누고, 신호등 건널 때는 다른 버스의 지인들도 만났다. 삼원색 리본과 손에 손을 잡은 모습들이 병아리 유치원생 같았다.
주문진에 도착해서 중식 후, 해풍을 쏘이면서 다시마와 건어물도 샀다. 경포대 먼 수평선에 밀려오는 하얀 파도와 자갈도 밟았다. 일행들은 세월에 처진 어깨와 굽은 등을 잊은 듯, 활기찬 걸음을 떼기 시작했고, 모두 다시 빛나는 청춘으로 돌아간 것처럼 바닷가를 걸었다.
오죽헌에 도착하니 내리던 비도 그쳤다. 따스한 봄 햇살이 노년 나들이객의 허기진 마음을 달래주는 듯하다.
뜰을 감싸 안은 나무들과 주위가 더 고즈넉했다. 비록 옛 까마귀는 볼 수 없지만, 아마 햇빛에 반사해 붉은 까마귀가 되었으리라.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라는 책에 나오던 까마귀, 적오(赤烏)일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바닷가를 지나 율곡 선생님의 사당, 문성사로 향했다. 뒤뜰에 선 대나무 줄기가 오늘따라 더 검게 보였다. 신사임당 동상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율곡 선생님의 예절과 효심에서 거룩한 모정이 효자를 낳았다는 감흥을 받았다.
돌아오는 시간, 돌림 노래에 버스도 흔들흔들 리듬을 타는 것만 같았다. 출발할 때의 서먹함을 잊고 함께 어우러진 사람들. 노래방 기기도 한몫했지만 기기 이전에,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서로의 닫혔던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노래의 힘'이라는 장은 '그날의 노래들'을 생각나게 했다. 여행의 시작은 오디오에서 나오는 '타인(가수)의 노래'였으나, 여행의 마무리는 '우리의 노래'였다. 타인의 노래는 처음 만나 서먹한 이들에게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게 해 줬다. 하지만 여행은 길을 가는 것이고 타인을 만나는 것이다. 나와 타인의 노래가 서로 섞이며 우리는 하루 내내 닫고 있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삶이 정체돼 있는 것 같을 때 익숙한 곳, 아는 이들을 떠나보자. 노래도 불러보자.
<그리스 로마 신화>의 '노래의 힘'이라는 소제목이 이제 이해가 간다. '노래'는 닫힘을 열림으로 딱딱함을 부드러움으로 바꿔놓는다. 때로 노년을 청년으로 돌려놓기까지 하니 이 얼마나 신비로운 '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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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 픽사베이, Dawnyell Re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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