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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얌 Jul 09. 2022

은어 군밤

군밤을 맛있게 먹는 6하 원칙: 언제 누구랑 같이...?

날씨가 쌀쌀하다. 휴대폰이 울린다. 반가운 목소리다. 친구가 오늘이 유성시장 장날이라고 구경을 가자 한다.


우리는 마을버스를 타고 유성장터에 내렸다. 모자를 눌러쓴 중년의 남자가 밤을 까며 앉아 있는 모습이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곁엔 아내로 짐작되는 여인이 나란히 앉아 화로처럼 생긴 기계에서 군밤을 꺼내 행인들에게 맛을 보라면서 권한다. 그녀의 손바닥이 까맣다. 우리에게도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알밤을 먹어만 보란다. 


군밤을 받아 손으로 굴리며 사방을 둘러보니 근처 마늘 까는 할머니가 보였다. 손톱 아래 낀 새까만 마늘 때가 마늘과 함께한 할머니의 세월을 말하고 있다. 


친구와 나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먹자골목 낮은 의자에 앉았다. 친구는 보리밥, 나는 팥죽 한 그릇을 시켰다. 둘은 옛 맛이 날 것이라는 기대감의 눈길을 주고받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친구는 옛날 보리밥 맛이 아니라는 눈치다. 나는 "괜찮네."라고 한 마디 내뱉았다. 둘은 웃으며 맛있게 식사를 했다. 


옆자리엔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오손도손 옛날국수를 먹고 있다. 마지막엔 그릇을 들고 국물까지 다 마시며 ‘아 시원해’라며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다정'이라는 말이 이럴 때 참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아주머니 세 명은 음식을 먹고는 값을 서로 내려고 야단이다. “오랜만인데 내가 낼게. 그만 집어넣어.”라며 팔을 휘휘 저었다. 손이 허공에 길은 낸 자리에 은회색 정이 흘러간다. 친구와 나 그리고 그 누구라도 여길 들어서면 나이를 멈추게 하니 오일장이야 말로 ‘청춘 시장’이라 하겠다.




보름 전, 수필 반 멤버들과 대전역에서 만나 서울에 가기로 했다. 수필반의 인기 스타인 ‘대박(닉네임)’ 문우의 미술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승강장에 서 있을 때였다. '마 작가'와 '순희 성님', 두 문우가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두 분 손에 무언가가 무겁게 들려 있었다. 군밤과 귤이었다. 


우리 문우들은 다 함께 6호차에 올라 앞뒤 좌석이었다. 나는 성님과 나란히 앉았다. 바쁜 나날에 고속버스만 타다가 수년 만에 열차를 타니 '청춘 열차'에 탄 것처럼 시간도 멈춘 듯했다. 


열차는 느릿느릿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서울로 향했다. 성님이 주먹손으로 집어 건네준 따뜻한 군밤을 나는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군밤이 참 고소해요.” 


달콤 고소한 맛이 입안에서 사라지려 할 때마다 성님은 내 손바닥에 몇 알씩 더 얹었다. 마치 어미가 새끼를 챙기는 새들처럼. 


모처럼 둘이서 군밤을 먹으며 구수한 이야기를 나누니 서울행 기차가 더욱 정겹고 푸근했다. 문득 어릴 적 먹던 군밤이 떠올랐다.


어릴 적 고향집 뒷산에도 밤나무가 많았다. 가을이면 어머니는 밤을 따서 아궁이 잿불에 구워 식기 전에 나에게 먹으라고 했다. 그리곤 유성시장의 군밤 파는 여인처럼 새까만 손으로 담 너머 이웃집 내 친구에게도 건네주며 담을 사이로 한참 동안 서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요즘은 아파트 시대, 위아래 사는 이웃들의 얼굴 익히기도 어렵다. 맞은편 집도 문만 닫으면 생소하다. 어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사도 할 똥 말 똥 머뭇거리다 멀뚱멀뚱 다시 앞으로 보기도 한다. 소통의 단절이 자연스러워진 현대인의 모습, 자본주의에 개인주의가 더해지니 뭔가 풍요와 자유를 얻은 것 같으면서도 '단절'과 '불통'을 대가로 치르는 기분이 든다.




유성시장 구경을 마치고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오면서 시장에서 산 군밤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지난번 서울행 무궁화호 열차에서 성님이 준 군밤의 맛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맛이 아니었다. ‘도루묵’이었다. 열차에서 성님이 내게 준 군밤은 그 무엇으로도 재현할 수 없는 ‘은어(임진왜란 때 피난길의 선조가 먹고 반했던 생선)’ 맛이었다. 그날 서울행 기차 안에서 순희 성님이 까서 건네주던 그 군밤은, 어느 새 그리움이 되고 시(詩)가 되었으니....


내일은 수필 수업이 있는 날이다. 조선시대 선조 임금의 '은어' 못지않은 '군밤'을 선물해 준 수필반 '순희 성님 '을 만날 생각에 소풍 전날 아이처럼 설렌다.



표제 및 본문 이미지: 픽사베이



글쓰는 할머니, 구하나

: 손자들을 키우러 상경했다 60에 여고 입학, 70에 국문과에 입학, 팔십대인 지금까지 팔팔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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