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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Sep 03. 2023

미워할 수 없는 나쁜 남자

스탕달, <적과 흑>

고전 소설로 아이들을 유혹하려면 주인공이 엄청나게 매력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두꺼운 책에 눈길조차 주지 않을테니, 어떻게 해서든 첫 장을 넘길만한 미끼가 필요하다.


소설 속 주인공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을 고르라면,

이 사람은 4강전 정도는 무사히 진출하지 않을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활자로 묘사된 것만으로 순식간에 독자를 매혹시킬 수 있는 그는 바로, 스탕달이 쓴 <적과 흑>의 주인공인 쥘리앵 소렐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쥘리앵을 소개할 때 '밀당의 고수'라거나 전형적인 '나쁜 남자'라고 말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남학생도, 여학생도 모두 고개를 들고 관심을 가진다. 애들의 관심을 끌어보려 하는 말이지만 뭐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니까. 그리고 영화 <적과 흑>의 한 장면이라도 보여주면 금새 여학생들의 눈이 커진다.


어머, 선생님. 엄청 잘 생겼잖아요!!!


훗.


아니, 애들아.

나쁜 남자라니까.


어느 유튜버는 '나쁜 남자'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며, 여자들이 말하는 나쁜 남자는 그렇게 말하는 본인에게 다정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남자일 뿐이라고 했다. 속칭 나쁜 남자라는 그 사람도 자신이 반한 누군가에게는 착하고, 세상 더없이 다정한 좋은 남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며. 아픈 결론은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쥘리앵은 거절당한 여자들의 세계에서나 존재하는 나쁜 남자가 아니라, 정말로 나쁜 남자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나면 그를 미워할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왜 그럴까?



때는 19세기 초반 프랑스, 여전히 귀족이니 평민이니 하는 신분 제도가 힘을 발휘하고 있던 시절이다. 우리의 주인공 쥘리앵 소렐은 가난한 목수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와 사회가 바라는 것은 열심히 일을 하고 집안의 소득에 보탬이 되는 것뿐이다. 그의 아버지는 거칠고 욕심 많은 인물로,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쥘리앵을 때리고 그가 가진 유일한 책을 던져버리는 등의 구박을 일삼는다. 쥘리앵의 두 형은 그런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킬만큼 건장했고, 다른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쥘리앵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의 몸은 거친 육체 노동을 하기엔 너무 약했다. 게다가 일을 하는 것보다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해 한눈을 팔기 일쑤였으니, 집안에서는 골칫 덩어리 문제아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아주 똑똑했다는 것,

뭇 여성들이 반할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는 것,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과 지위에 만족하지 않을만큼 야심이 컸다는 것이다.


타고난 지위와 신분은 미천했지만, 나폴레옹을 숭배하는 그의 마음 속에는 더 높은 곳을 향한 열망이 숨겨져 있었다. 신분제가 남아 있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평민이 성공할 수 있을까? 그 시대에 평민이 높은 지위와 부를 가지려면 성직자가 되거나 군인이 되는 길 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그래서 쥘리앵은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때도 교육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신분 상승의 꿈이라도 꾸어볼 수 있는 유일한 사다리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귀족 집안의 가정 교사가 되면서부터 꿈은 조금씩 현실이 되기 시작한다. 다른 귀족과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며 경쟁하던 도시의 시장님은 자녀들의 가정 교사로 시에서 라틴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아는 유일한 청년, 쥘리앵을 선택했다. 그것도 값비싼 수업료를 지급하고 말이다. 쥘리앵은 아버지와 형들의 구박에서 벗어나 어여쁜 아이들, 젊고 아름다운 시장님의 부인과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시장님의 아내, 드 레날 부인이 쥘리앵을 좋아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급격히 긴장감을 몰고온다. 부르주아에 대한 반감으로 여보란듯 부인을 꼬시고 가끔은 일부러 괴롭히기까지 했던 쥘리앵은 자신을 향한 자연스럽고 순수한 그녀의 애정에 진심으로 마음이 움직인다.


여기에 이르면 아이들은 웅성웅성댄다.

뭐? 불륜 소설이라고??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 책의 소재 중 하나일 뿐, 불륜을 소재로 했다고 해서 이 책이 지닌 다른 많은 의미와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하여간에 두 사람은 서로를 마음에 품었지만,

하녀에게 발각되면서 쥘리앵은 드 레날 부인의 집을 떠나 파리로 향한다. 파리의 사교계, 시골 구석과는 비교도 안되게 화려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여인들. 후작의 비서 자리를 소개받은 쥘리앵은 그의 젊고 아름다운 딸 마틸드를 꼬셔서 결혼을 통한 완벽한 신분 상승의 기회를 잡게 된다. 여기에서 마틸드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쥘리앵의 전략을 보면 밀당의 고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동시에 그가 마틸드를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하고 오만하기로는 마틸드도 만만치 않았던 터라 쥘리앵의 그런 전략이 이해가 갈 법도 하다. 사실 두 사람은 오만하고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한다는 점에서 매우 닮아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매달리면서도 마틸드에게서 언뜻언뜻 보이는 차갑고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눈빛과 떠나온 드 레날 부인의 자연스러운 애정을 비교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이 그녀를 좋아한다고 믿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뭔가를 강렬하게 추구하면서 마치 고도의 전략이 필요한 게임에서 이기는 듯한 도취감이 그가 스스로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멀리 시골에서 쥘리앵과 마틸드의 결혼 소식을 들은 드 레날 부인, 진심으로 그를 좋아했던 그녀는 커다란 충격과 배신감에 파리로 편지를 띄운다. 그리고 그 편지로 인해 쥘리앵의 약혼은 깨어지고, 분노한 쥘리앵은 한때 연정을 품었던 드 레날 부인에게 총을 겨누게 된다.



결국 쥘리앵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 그는 감옥에 갇혀 감히 귀족 부인을 죽이려 한 죄로 사형날만 기다리고 있다. 바깥에서는 친구와 마틸드가 그를 살려보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지만, 그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감옥에 갇혀서야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천천히 돌아볼 기회를 가진 쥘리앵은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삶은 끝도 없는 저ㅡ 위를 향해 달리기만 하는 것이었고,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민이 귀족들 사이에서 어울리고 결혼까지 하려니 그는 늘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그들이 자신을 무시하지는 않는지 경계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멈출 수 없었던 욕망을 멈출 수 있게 되어 다행인지도 몰랐다. 어깨에 총을 맞은 드 레날 부인이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눈물을 흘리며 신에게 감사했다. 자신은 죽지만 그녀는 살아남아 자신을 용서해주고 사랑해줄 것이다. 이제 그는 감옥 안의 생활이 권태롭지 않았고, 더 이상 아무런 야심도 없었다. 마틸드는 별로 생각나지 않았고, 회한만이 남았다. 그리고 드 레날 부인의 모습만이 떠올랐다.


어느날 마틸드가 감방에서 나가자 쥘리앵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 대한 저처럼 강한 정열에도 내 마음은 무감각하기만 하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두 달전까지만 해도 나는 저 여자를 열렬히 사랑했는데! … 그의 가슴 속에서 야심의 불길이 꺼지고 잿더미로부터 다른 정열이 솟아났다. 그는 그 정열을 드 레날 부인을 죽이려 했던 것에 대한 회한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부인이 몹시도 그리웠다. 방에 혼자 남아서 아무 방해도 받을 염려가 없을 때면, 그는 전에 베리에르나 베르지에서 보냈던 행복한 날들의 추억에 오롯이 잠겨 이상한 행복감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너무나 빨리 흘러가버린 그 시절의 사소한 사건까지도 지금 그에겐 신선하고 비할 데 없는 매력으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파리에서 거둔 성공 따위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것에는 이미 신물이 나 있었다. ㅡ 354쪽


아,

언제 가장 마음이 편안했던가?  언제 가장 행복했던가?


그가 아무런 생각 없이 행복했던 순간은 드 레날 부인과 함께 그녀의 아이들을 가르치며 노닐던 때였다. 그제서야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드 레날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그런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죄의 댓가를 기꺼이 치를 것임을 깨닫게 된다. 동시에 귀족이라는 지위를 얻기 위해 고도의 밀당 전략을 구사했던 마틸드에게는 그와 같은 마음이 없다는 것, 자신만이 아니라 마틸드 역시 자신을 향한 마음이 순수하고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과시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챈다.  


신분은 미천하지만 똑똑하고 잘 생긴 청년과 결혼한 귀족가의 딸! 사형 선고를 받은 애인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는 여자!! 마틸드는 그런 타이틀이 필요한 여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쥘리앵은 이제 그런 것에 지쳐있었다.


쥘리앵은 자기가 그 많은 헌신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지금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하고 순진하며 수줍은 애정일텐데, 마틸드의 오만한 마음은 여전히 관중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념이 필요했다. ㅡ 353쪽


반면 드 레날 부인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신을, 처음 저택의 문을 열었던 날 낡은 옷에 잔뜩 날이 선 채로 긴장해 있던 자신을, 신분이 낮고 가난하다는 자격지심에 그녀가 보여준 많은 호의를 오해하고 차갑게 굴었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준 사람이었다. 쥘리앵의 예상대로 드 레날 부인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마저 용서한 채 감옥으로 찾아와 쥘리앵을 위로한다. 그녀는 자녀와 남편에 대한 의무와 죄책감으로 괴로워했지만,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길을 선택했고, 그 대가를 치르기로 결심한다.


소설의 마지막,

쥘리앵은 평민은 단 한 명도 없이

귀족들로만 구성된 배심원단에 둘러싸여 사형을 선고받는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자신과 같은 신분의 사람이 없다는 사실, 낮은 신분의 청년이 자신들과 대등해지려 하는 것을 가로막는 귀족사회 위선을 꼬집으며 최후 변론을 마친다.


그가 죽은 뒤,

마틸드는 그를 위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드 레날 부인은 그가 죽은지 사흘만에 숨을 거두었다.



이쯤되면 왜 나쁜 남자인 쥘리앵을 미워할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넘사벽으로 똑똑한 미소년이라 해도)

그가 가진 욕망, 좌절, 회한은 우리에게도, 나에게도 똑같이 있으니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가 타고난 신분의 한계에서 벗어나려 가족도, 사랑도, 자기 자신조차 버린 채 발버둥치다 죽음 앞에서야 그 모든 것이 부질 없었음을 깨닫는 순간ㅡ

공식적인 신분제는 없지만, 우리 역시 무언가 더 큰 것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계속 앞만 보고 달려가다 어느 순간 이게 맞는 것일까? 나는 언제 진심으로 행복하고 편안했던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때가 온다. 쥘리앵처럼 행복했던 순간은 거창하고 화려한 날이 아니라 평범한 어느 저녁의 밤바람과 산책, 맞잡은 손이었단 걸 깨닫는 순간이.


그래서

갖은 노력에도 실패한 그가 한편으론 안쓰럽고, 또 한편으론 마지막 순간에라도 진실한 사랑과 마음의 평화를 찾아서 다행스러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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