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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Apr 15. 2024

모르고 봐도 괜찮은 사람

알렉산더 페인, <바튼 아카데미>

영화 <바튼 아카데미>를 보면서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이 뭔가'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이전에 하얗게 눈이 덮힌 순백의 스크린과 아련하게 보이는 학교를 보고, 먼저 반했다!!)


원칙주의자에 고집 센 역사 교사 폴, 그는 학생들도 동료교사도, 이제 교장이 된 옛 동료까지 거의 모두가 불편해하는 사람이다. 재혼한 엄마가 신혼여행을 떠나버려서 크리스마스에 홀로 학교에 남게 된 털리도 마찬가지다. 머리도, 성적도 꽤 우수하지만 친구들과 선생님 모두에게 거칠고 삐딱한 그 역시 흔히 말하는 따뜻하고 좋은 사람의 이미지를 찾기는 어렵다. 그런 두 사람이 (급식 담당 요리사 메리까지) 크리스마스 연휴에 학교에 남아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숨겨진 모습을 알아가는 이야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깐깐해보였던 역사 선생님이 사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구나, 말썽꾸러기 털리도 마음 여린 소년이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두 주인공을 단편적으로가 아니라 조금 더 넓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폴도, 털리도 알고보니 따뜻한 사람이었더라.

첫 인상이 준 얄팍한 편견 이상으로 괜찮은 사람이었더라.


하지만 아마 폴은 여전히 깐깐한 원칙주의자, 방학식날까지 재시험을 보는 선생님일 것이다. 그리고 털리는 폴 같은 그런 선생님을 여전히 싫어하고 수업을 방해하며, 친구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는 학생일 것이다. 우리가, 다른 모두가 싫어하고 불편해하는 점을 영화가 끝난 지점까지 폴과 털리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갑자기 모두가 좋아할 만한 면모만 가진 다른 사람이 된 것인가 하면,

전혀 아니다.

(다 보고 나오면서 친구가 그래서 더 설득력이 있다고 했다. 또 그래서 다행이었다. 어떤 하나의 사건으로 한 사람이 180도 바뀌는 건 비현실적이기도 하거니와, 그 사람이 원래 가진 면모를 한꺼풀 더 알아가고 이해하는 느낌이 아니라 인간을 몽땅 개조하는 느낌이라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폴과 털리는 원래부터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었다.

깐깐하고 괴짜 같지만 어머니가 편찮으신 동료교사 대신 휴가를 반납해 줄 정도, 짓궂고 제 멋대로지만 밤에 침대에서 실수를 한 친구를 눈감아주고 도와줄 정도의 따뜻함을 가진.


우리도

그들도

서로에 대해 잘 몰랐을 뿐.




"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 "


우린 어떤 사람을 묘사할 때 이런 표현을 종종 쓴다.

겉보기에는 그리 좋은 사람 같지 않았으나, 조금 더 깊이 알고보니 좋은 면도 많았다는 뜻이겠지.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는만큼 보인다고 한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많이 들었던 말이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고 해봐야 뭘 모르는 내 눈에는 이 작품이 위대한 수많은 이유가 다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전에 공부를 좀 하고 왔어야 하나, 후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몰라서 보이는 것도 꽤 많아서, 꼭 미리 알고 가는 게 좋은지 확신할 수 없었다. 보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라 아마 그 작품이 좋은 이유도 구만구천구백아흔아홉가지가 넘겠지. 나는 뭔가 사전 정보를 가지고 가면 그 틀 내에서 보려고 하는 경향이 생겨서, 적당히 알고 가거나 아예 모르고 가는 게 낫다 싶기도 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오래 보면 예쁘다고 했던가.

에리히 프롬도 사랑을 하려면 상대에 대한 지식, 앎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수학 공식, 법률 용어, 사회학 개념 이런 건 내가 알고 모르고를 그나마 말할 수 있겠는데(사실 이것도 애매하게 아는 것, 어디서 들어보기만 한 것 투성이라.. 생각해보면 나는 아는 게 별로, 거의 없다. 선생님이라는 직업 때문에, 그것도 사회 선생님이라는 과목적 특성 때문에 뭔가 많이 알거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음음음.. 나는 그런 기대에 찬 눈이 부담스럽다.)


글쎄..


사람을 안다는 것은 뭘까?

우리는 어떤 사람을 다 알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점점 그것은 굉장히 어려우며,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문득 내 인생에서 한 사람을 온전히 다 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을 하고 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쳐간다.


그러다가 꼭 우리가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아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잘 알지 못해서 오해도 하고, 거리감도 느끼지만.. 그런 순간들이 있어서 오해가 깨어지고 누군가와 확 가까워지는 경이로운 순간이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 잘 알지 못해서 상대를 그냥 있는 그대로 봐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나는 내 의도를 너무 잘 읽는 사람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 그냥 모르면 모르는 대로 나를 봐주는 게 좋다.) 그리고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은 아름답지만, 이쪽에서 말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 다 알려고 하는 그 애씀이 상대에게는 부담스럽고, 그 과정이 퍽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도, 좋아할수록, 가까울수록 상대를 많이 알고 싶어한다.^^;; 그러고보면 내로남불과 언행불일치는 심하지 않다면, 적당히 봐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도 그런 때가 있으니까. )  


오늘 아침에 떠오른 생각은 그냥 이런 거였다.

우린 누군가를 다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아마 평생 노력한대도,

내가 노력하는 그 평생동안

그 사람이  시시각각 변할테니까.


하지만 그가 보통의 인간이라면,

내가 알지 못한대도,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가까이서 보면 멋진 점이 있다고 에티커스 변호사가 말했다.)



이동진씨의 파이아키아에 김창완 아저씨가 나왔다.

24년 간 라디오를 진행했고, 최근에 그만두었다. 매일 아침 느낀 것을 오프닝 멘트로, 직접 쓰셨다고 했다.

직접 쓴 것도 놀라웠지만, 그 내용이 방송용 오프닝 멘트가 가진 상투적인 면이 거의 없었고 자유로웠다고 (이동진씨가) 그랬다.


아주 자유롭게 끝나는 게 많았다고.


나도 그런 유연함이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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