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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연 Mar 20. 2022

이 사건의 증인은 누구인가?

대중문화비평 TV언박싱 34. <레벤느망>


스물셋이 되고 싶다

영화는 평범한 문학 전공생 ‘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안은 학교에서 교수 준비 제의를 받을 정도로 총명한 학생이다. 노동하느라 손이 까매졌다는 이모는 안의 손을 보고 “너는 수재야”, “네 손은 일할 손이 아니야” 라는 말을 자주 하고, 식당을 운영하는 엄마는 아버지 몰래 용돈을 주며 소설책을 사 읽으라 한다. 가족들의 사랑과 지지를 잔뜩 받는 평범하고 똑똑한 문학도. 그런 그가 임신했다. 겨우 스물셋의 일이었다.


스물셋이란 어떤 때인가. 친구들과 잔디밭에 누워 스페인어 동사변화표를 외우느라 바쁘고 밥 먹으면서도 사르트르를 이야기하는 게 전부인 시절이다. 불법 낙태 시술을 받기 위해 고작 소중한 소설책을 파는 것밖에 못 하고, 임신으로 마음이 복잡한 와중에 옆에 또래 친구들은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떠들 나이. 안은 온전한 스물셋이 되고 싶었다. 어떻게든 아이를 지워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잖다. 영화의 배경인 1960년, 프랑스는 낙태가 불법이다. 가톨릭의 오랜 전통으로 제도적 한계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도 몹시 좋지 않았다. 안이 낙태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어떤 의사는 화를 냈고, 또 어떤 의사는 이만 받아들이라고 조언했다. 친구들은 못 들은 거로 하겠다고 자리를 피해버리고, 같은 학년 남자애는 임신했으니 안전한 섹스를 할 수 있지 않냐며 꼬드긴다. 안은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철저히 혼자였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해결책은 여전히 찾지 못했다. 입맛은 늘고, 배는 불러갔다. 그런데 그때. 뭐랄까, 카메라의 시선이 심상찮다. 영화는 시종일관 안의 뒷모습을 졸졸 쫓아다니면서 그의 옆에만 자리한다. 심지어 관객은 안과 종종 눈이 마주치기도 한다.




카메라의 자리

아닌 게 아니라 영화 속 앵글은 1.37:1의 좁은 폭으로 안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확히는 안'만' 보여주는 듯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술집에서 친구가 다가와 안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눌 때, 친구는 화면 속으로 보여주지 않고 오로지 대답하는 안만 내내 보여준다. 낙태 경험이 있는 여자 친구를 소개해 달라고 남자 동기에게 부탁하는 저녁 식탁에서도 같은 구도가 이어진다. 주변인은 거의 비추지 않고 어떤 상황에 부닥친 안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 보니 이런 느낌도 든다. 마치 카메라가 자리한 곳에 내가 앉아있고 조용히 그를 관찰하고 응시하는 느낌.


이러한 시선은 안이 보는 것을 뒤늦게 따라가는 형식으로도 드러난다. 생리하는지 확인하려 속옷을 내려 점검할 때, 낙태 시술 이후 몸에서 빠져나온 것을 확인할 때. 안이 고개를 내려 내용물을 보는 순간, 그보다 조금 늦게 카메라는 안의 시선을 따라가고 관객은 그 속도를 따르게 된다.



이 해프닝의 증인

궁금하다. 대체 왜 이런 ‘눈길'을 만들었을까? 잘 정돈된 보도블록처럼 왜 관객을 그곳으로 따라 걸어오게 했을까? 안은 사회 제도는 물론 가까운 주변인까지 공식적·비공식적으로 외면 받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저녁, 기숙사 냉장고를 뒤져 남이 먹고 남긴 음식을 먹는 것만이 타인과 연결된 유일한 행위일 뿐이다. 이토록 소외된 어린 여자를 보면서 그제야 카메라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에 그를 돕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관객이라도 그의 바로 곁에서 지켜봐 주라는 것. 이 사건(L'Evénement)의 동시적 증인이 되어 우리가 그의 고통을 봤노라고, 우리가 그의 내몰림을 알고 있노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태아는 조금씩 자라났고 여전히 어디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자 안은 뜨겁게 달군 쇠꼬챙이로 자궁을 깊숙이 찔렀다. 실제로 서양 낙태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옷걸이다. 낙태가 금지된 국가에서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여성들은 긴 옷걸이를 이용해 자가 시술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낙태권 촉구 시위가 열릴 때면 여성들이 다른 것 아닌 옷걸이를 들고 나가는 이유다. 왜 먼 곳에서의 앵글이나 넓은 화각의 구도로 보여주지 않고 안의 측면에서, 안의 가까운 맞은 편에서 촬영했는지 알 수 있다. 음지 문화는 타인에 의해 발화되어야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타인이 필요할까

의사가 말했다.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사로부터 들어야  말은 이게 아니다. 정작  말을 해주어야 하는 주변인은 말을 감췄고, 법과 제도로 도움을 건네야  의사는 감정에만 동조한다. 아무도 주인공 편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이젠  옆에 우리가 있다. 안이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이  , 우리는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증인으로 서면 된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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