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자유의 상징, 존 레논 벽
고정관념은 우리의 시각을 편협하게 하여 대상을 넓게 바라보지 못하고 그 역할을 한정 지어 버린다. 이로 인해 여행지에서 잃어야 하는 비용과 시간은 오로지 여행자의 몫이다.
까를교를 건너는 여행객들이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고정관념은 끝에서 끝을 연결하는 다리의 기능이다. 까를교를 단순히 강을 사이에 두고 끝에서 끝을 연결시키는 구조물로 한정시켜 생각하면 레논 벽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미로와 같아진다. 까를교에는 볼거리가 많은 만큼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걷다 보면 어느덧 레논 벽은 까맣게 잊고 자연스럽게 프라하 성으로 걸어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웃지 못할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이러한 불상사가 잃어 나지 않도록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천천히 까를교를 건너보자.
레논 벽으로 향하는 길은 의외로 간단하다. 프라하 성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네포무크 성인의 동상을 지나 조금 걸어가다 보면 왼쪽에 나가는 길이 보인다. 조금만 신경 쓰면 바로 보이는 이 길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여행객에게는 숨은 그림 찾기보다 어려운 길이 된다.
틈새 길을 찾았다면 레논 벽까지는 금방이다. 옆길로 빠져나와 첫 번째 우측 골목으로 꺾으면 레논 벽이 근처에 있음을 얘기하듯 ‘존 레넌 펍’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를 이정표 삼아 우측으로 시선을 돌리면 작은 다리가 나오는데 존 레넌과 오노 요코의 사랑을 상징하듯 곳곳에 사랑의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연인들이 채워놓은 자물쇠를 보며 다리를 건너면 이제야 비로소 형형색색의 글자로 채워진 레논 벽에 도착하게 된다.
'프라하의 봄' 이후 체코(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사회분위기는 암울 그 자체였다. 이 시기에 음악은 어둠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던 체코 청년들에게 유일한 해방구의 역할을 했고 비틀즈의 노래는 이들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었다.
그러던 1980년 12월 8일, 존 레넌이 살해당하자 평소 그를 동경했던 체코 청년들은 한적한 캄파 지구(Kampa Island)에 모였고 당시 프랑스 대사관 맞은편에 있는 큰 벽에 존 레넌의 얼굴을 그려 추모하기 시작했다. 추모 이외에도 자유를 염원하는 비틀즈의 노래 가사와 정치적인 문구를 쓰기 시작했는데, 당시 공산주의 국가였던 체코 정부는 이들의 선동을 막고자 알코올 중독자, 정신 이상자로 규정하고 잡아들임과 동시에 정기적으로 벽을 지워 자유의 의지가 피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지금의 인터넷 게시판처럼 레논의 벽은 공산주의를 성토하는 글과 평화를 지향하는 글로 금세 채워졌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만인의 게시판으로 남게 되었다.
이처럼 레논 벽은 공산주의 시절부터 프라하 시민들이 사랑하는 장소로 여겨졌고 이 때문에 여러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가장 최근의 사건은 2014년 레논 벽이 온통 하얀색으로 지워진 일이다.
벨벳 혁명 25주년인 2014년 11월 17일 새벽, 레논 벽이 온통 지워진 채 한가운데에 'Wall Is Over!' 문장만 적어놓은 사건이 일어났다. 프라하 언론은 아침 특보로 "오늘 우리에게 의미 있고, 우리가 사랑하던 곳을 잃었습니다. "#lennonwall #wallisover"의 헤드라인을 걸고 대서특필하며 이 사건을 일으킨 단체를 비난했고 더불어 레논 벽의 소유주체인 몰타 공화국 또한 기물파손 죄로 고소를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을 일으킨 단체는 자신들이 프라하 예술학교 학생단체(Pražská služba)라고 밝히며 다음과 같이 프로젝트의 취지를 설명했다.
"25년 전 우리는 평화적인 힘으로 공산주의 벽을 허물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벨벳 혁명에 대한 기억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려 했다. 'WALL IS OVER'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대란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후 고소는 취하되었고 'Wall Is Over' 아래 'The wall is NEVER OVER!' 문구가 새겨진 것을 시작으로 금세 원래 모습을 회복했다.
처음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익숙한 멜로디의 이끌림 때문이다. 프라하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겨울이 다가옴을 알리는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던 어느 날, 우연히 골목을 헤매는 와중에 귓가에 익숙하고 은은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가랑비에 몸이 천천히 젖어가듯 작은 음표들에 천천히 젖어가던 나는 어느덧 레논 벽 앞에서 기타를 치며 ‘Imagine’을 부르는 한 할아버지 앞에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익숙한 멜로디에 의미 없는 가사를 흥얼거리던 노래였지만 이날은 분위기 때문인지 가사가 한 소절 한 소절 귀에 들어왔다.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 봐요.
당신이 노력하면 어렵지 않아요.
지하에 지옥은 없어요.
머리 위에 오직 하늘이 있을 뿐.
모든 인간이 오늘을 위해 산다고 상상해 보세요.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 봐요.
그건 어렵지 않아요.
죽이는 것도 없어요.
역시 신앙도 없어요.
모든 인간이 평화롭게 산다고 상상해 보세요.
내가 몽상가라고 당신은 생각할지 몰라요.
그러나 난 몽상가가 아닙니다.
언젠가 그날이 올 겁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가담하게 되고 세계는 하나가 될 겁니다.
소유물이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당신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욕심도 없고 굶주림도 없고 형제애와 인간애가 있을 뿐입니다.
모든 인간이 서로 도우며 산다고 상상해 보세요.
레논 벽의 시작이자 당시 자유를 갈망하던 체코 청년들의 염원이 투영된 이 노래를 듣고 있으니 가슴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드는 것만 같아 괜스레 한 글자 적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나도 이 벽에 한 글자 흔적을 남겼다.
레논 벽은 처음 시작부터 단 하루도 같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자유를 갈망하던 체코의 청년들이, 현재는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는 개성 있는 젊은이에서 기업까지 다양한 글귀와 그림이 매일 생기고 지워진다.
여행에 지치고 가슴에 답답한 날 이곳을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 한없이 즐겁기만 할 것 같았던 여행지에서 받는 스트레스, 인간관계 혹은 뒤에 남은 여행의 다짐과 바람을 벽에 새기면 홀가분해짐과 동시에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시 여행을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