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기억 속에서.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그리고 자주 묻는다. 도대체 뭐하는 분이세요?
'그러니까.. 난 누구지. 난 뭐하는 사람이지.'
왜 중학생 때 해봄직한 정체성에 대한 궁금증을 인생 반백년 가까이 살아온 지금에 다시 시작하고 있는 건지.
내 정체성의 모호한 제공자는 아빠다. 시골에서 이사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글도 떼지 못한 때 구정물 묻은 아이를 동네 유지들만 다닌다는 유명한 피아노 학원에 몰아넣었다. 요즘 같으면 어린아이들도 자기 주관을 강하게 표현한다는데 난 아빠가 시키면 그게 법인 줄 알고 살았으니 그 환경 속에서 얼마나 창의력이 발달했을까나 싶다. 그림이 그리고 싶어 화방에서 미술도구를 사다 숨겨두면 아빠는 용케 알고 찾아서 모두 갖다 버렸다. 그림은 그려서 뭐해. 커서 극장 간판 그릴래? 이건 뭐.. 아빠가 지닌 직업세계관의 한계다.
다른 건 해볼 생각도 못했다. 아빠의 울타리 안에서 그것만이 내 세상인 것처럼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다.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초. 중학교 다니면서 전국 각종 음악 경연대회에 참가하고. 고등 3년을 음악 장학생으로 졸업했다. 대학 생활에서도 졸업 때까지 음악 이외의 관련된 사람들과는 어울릴 일이 많지 않아서 나의 생활은 순조롭고 단순했다. 사회에 진출해서도 연애하고 두 자녀를 낳아 성장시키는데 까지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변화하고 있는데 난 그 자리에서 계속 맴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한지는 오래된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생각을 좀 더 일찍 했어야 했다. 그리고 나의 정체성에 대한 긍정적인 합리화를 시킨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불운했던 시절이라고 생각되는 나의 유년기가 내 삶의 방향에 큰 영향을 준건 사실이다.
치매에 걸리면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사라진다고 한다. 한 사람의 살아온 일생은 치매 증세에도 크게 반영이 된다고 이미 의학에서 밝혀지고 많이 알려져 있다. 기억 속의 삶이 아름다웠던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기억에 의해 말로 행동으로 표정으로 나타나게 된다.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의 단편들. 일그러진 추억과 힘들었던 경험. 불안정한 생활이 내면 깊이 자리하고 있다가 드러나는 것이다. 가끔 어릴 적 두려운 경험이 꿈에 나타나곤 한다. 성인이 된 두 자녀가 있는 요즘에도 난 엄마를 놓치고 애타게 엄마를 찾아다니는 꿈을 꾸며 울다가 잠에서 깨어날 때가 있다.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계기들은 과연 나를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나의 첫 시멘트 집 그리고 흥남동 산동네
5살까지 살던 시골집은 동네 한가운데 위치한 한옥이라고 하기엔 부실한 초가집 수준이었다. 담을 대신한 탱자나무에 따로 대문이랄 것은 없었다. 집 뒤로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집을 둘러 사방은 밭이었다. 마을을 감싸 안은 산자락에 올라서 보면 산자락 아래에 빙 둘러앉은 집들과 달리 우리 집은 동네 한가운데 밭 사이에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술도 마시고 밥도 먹으며 밤늦게 까지 놀다 갔다. 아마도 지금의 반상회 같은 거였을지도.
시내로 이사를 나온 뒤로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집에 오는 일도 먹을거리를 서로 주고 나누는 일도 없어졌다. 집산이다. 집이 빼곡하게 많은데 집이 모여있는 산동네다. 집에 가기 위한 골목은 등산하는 기분이다.
한참을 갈래갈래 나뉘는 좁은 골목을 지나 꼭대기쯤 다다르면 파란 대문 집안에 또 여러 개의 문이 있다. 한 지붕 아래 여러 집이, 여러 가족이 살았던 것이다. 마당을 바라보며 향해있는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면 부엌의 형태를 흉내 낸 수돗가와 찬장, 그리고 곤로가 놓여있다. 싱크대라는 건 그때 당시에는 티브이에서나 나오는 설정인 줄 알았다. 6살 어린 나는 엄마가 바쁘면 종종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쌀도 씻고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냉수만 나오는 수도꼭지 하나였다.
밤이면 옆집, 뒷집, 골목 저 건너 어느 집인지 모를 곳에서 싸우는 소리가 가끔씩 들려왔다. 그때는 집집마다 웬 개를 그렇게 키웠는지 밤에 개 짖는 소리도 한몫을 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는지 나는 밤에 잠을 못 자고 계속 울어댔다고 한다. 매일같이 울어대는 통에 하는 수 없이 하루는 반대편 동네에 있는 외삼촌댁에 보내졌다. 외삼촌 집 역시 산동네에 위치했지만 그나마 환경이 좋았다. 서쪽으로 해가 내려앉는 땅거미가 아름다운 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거실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미닫이 문이 있는 방들이 많은 큰 집이었다. 거실은 마당과 땅거미가 한눈에 보이는 나무틀의 미닫이 문이었다. 드르륵드르륵 열고 닫히는 게 신기해 계속 여닫다가 시끄럽다고 혼이나기도 했다. 분명 엄마랑 같이 저녁도 먹고 마당을 보며 거실에서 엄마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는데....
두려움이라는 첫 경험
여전히 이 동네에도 개는 많았다. 개 짖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니 사방은 온통 깜깜했고 엄마의 향은 느낄 수가 없었다. 엄마가 사라졌다.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그 나이에는 알지 못했지만 그 느낌만은 아직도 확실하다.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 주위는 고요하고 개 짖는 소리만 간혹 들려왔다. 초저녁 바라보던 주홍빛 석양도 사라지고 가로등도 모두 잠이 들었다. 대문을 열고 밖을 내다봐도 엄마는 없었다. 골목을 향해 엄마를 외치며 울던 6살의 가여운 아이.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밤새 울음소리에 삼촌집은 난리가 나고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나를 삼촌은 차에 태워 다시 반대편 산동네에 있는 파란 대문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잠을 못 자고 있는 건 엄마도 역시나 였다. 지금은 흔해빠진 전화기 한통도 없어 연락도 불편하던 시절. 사촌 오빠 집에 어린 딸을 보내 놓고 걱정이 되어 제대로 누울 수가 없는 건 엄마니까. 엄마니까.
그 뒤로 나는 엄지 손가락을 입에 물고 다니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한 손은 입에 물고 한 손은 늘 엄마 옷자락을 잡았다. 엄마가 도망갈까 봐, 엄마가 날 버릴까 봐, 우리 엄마도 옆집 오빠네 엄마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까 봐.
옆집 아저씨가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와 세숫대야를 발로 차는 날이면 어김없이 욕설로 싸움은 시작되고 그런 날이면 엄마는 옆집 두 아들을 우리 집에 데려와 안 그래도 좁디좁은 방에서 우리 다섯 식구와 함께 잤다.
그렇게 많은 밤들을 가끔 보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지 옆집 오빠네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난 다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집을 나간 아줌마가 우리 엄마랑 나이도 비슷해 보였고 옷차림도 집안 살림도 서로 나을 게 없었다. 다행인 건 우리 집은 자식이 셋이라는 것이다.
엄마가 들려줬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 날개옷을 입은 선녀가 두 아이를 안고 하늘나라로 올라갔다는데 우리 엄마는 자식이 셋이라 못 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옆집 오빠를 두고 간 아줌마는 선녀가 아니다. 우리 엄마도 선녀가 아니다. 언젠가는 엄마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어린 마음에 깊이 들어왔다.
밤마다 엄마가 내 옆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하느라 자다가 깨고는 했다.
어린 나이에 하지 않아도 될 너무 큰 걱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