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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imolove Oct 12. 2021

거인의 꿈

날아라 병아리

공깃돌 5개만으로 하루 종일 즐거운 시절이 있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어쩌면 그 노래는 우리 동네 살던 사람이 만든 거라고 우겨도 맞을 만큼 아기자기한 산골 마을에 살았다. 내 기억의 한계는 공깃돌을 손바닥에서 손등으로 얹어 이겼는지 졌는지도 모르는 거기까지가 전부다. 그리고 옆에는 늘 할머니가 계셨다. 자매도 없고 동네에 여자아이라고는 나뿐이었다. 아이를 낳으면 학교를 보내는 불편함 때문에 젊은 부부들이 하나둘씩 인근 시내로 이사를 나갔기 때문이다. 동네에 또래가 없는 이유로 나의 최초의 단짝은 할머니였다. 


어릴 적 기억은 꿈이라고 해도 될 만큼 아름답다. 마당 한쪽 오동나무에 고무줄을 매달아 두고 할머니와 나는 번갈아 가며 고무줄놀이를 했다. 방죽 언덕에 오르면 종류를 알 수 없는 풀이 수북이 자라 있었다. 그중엔 겉잎을 떼어내고 나면 하얗게 부슬거리는 실타래 같은 모양을 한 ‘삐비’라는 띠 꽃이 있는데 기억에 즐겨 먹었던 것 같다.  사투리로 '삘리'라고 불리기도 하고 꽃이 덜핀 상태의 것을 먹는 것이다. 꽃이랑 뿌리를 약재로 쓰며 백모근화로 불리우고 뿌리가 대나무처럼 마디마디로 되어있어 씹으면 달작지근하다고 한다. 동네 슈퍼도 없고 문구점도 없어 특별히 손님이 오시거나 부모님이 귀가 때 사 오시지 않는 한 어린아이 입맛에 맞는 간식은 맛보기 힘들었다. 여름이 끝나갈 즘 방죽에 활짝 핀 연꽃이 지기를 기다렸다가 고개 떨군 연밥을 꺾어 나보다 큰 주물 솥단지에 넣어 쪄주면 먹어보겠다고 작은 손으로 연밥을 까던 기억도 난다. 그때는 집집마다 탱자나무로 담을 둘러 키우고는 했는데 할머니랑 숨바꼭질하다 보면 어린 맘에 숨느라 급해서였는지 지나치다 한번씩 큰 가시에 스치곤 했다. 크고 굵은 가시는 늘 조심해야 하는 무서운 존재였다. 그런데 난 지금도 탱자 묘목을 분양받아 애지중지 키우고 있다. 아무 맛도 향도 없는 삘 리를 찾아 한주먹 쥐고는 왜 그리 즐거워했을까.


인생이 천 개의 모자이크 조각이라면 나의 유년기 시골생활은 귀퉁이 한 조각일 거야. 맞추기 어려울 땐 네 귀퉁이를 가장 먼저 찾아서 끼워두면 그 주위 조각을 찾기 쉬워진다. 나의 유년기는 4조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참이나 지나버린 40년도 더 된 시절의 모퉁이 4조각. 이젠 그 조각의 기억만 남아있다.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 어리석은 이는 그것을 마구 넘겨 버리지만, 현명한 이는 열심히 읽는다. 인생은 단 한 번만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상 파울


어느 여름밤이었나,, 퇴방마루 안쪽에 빗장 걸린 상자는 우리 동네에서 모두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었다. 가끔씩 밤에 모여 마당에 나란히 앉아 상자 안의 텔레비전을 보면서 울다가 웃다가 심각했다. 옆집 할머니는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화를 냈다. ‘저번에 저 여자 죽었는데 또 나오네? 저 나쁜 년이 왜 살아나서 또 남의 남편 꼬신다.’ 그때의 나는 텔레비전 속의 세상은 아마도 우주 건너편에 있거나 지구처럼 큰 집들이 또 있는 줄만 알았다. 한바탕 소란스럽던 아무 말 대잔치를 끝마친 뒤 모두들 잠을 청하러 가고 나면 고요한 밤하늘 아래 풀벌레 소리가 뒤이어 잔치를 시작한다. 시끄럽지만 정겹다. 마당 마루에 누워있으면 밤하늘의 별이 내게 모두 쏟아질 것만 같아 가슴이 벅차오르던 5살의 동심. 이듬해 봄. 나도 다른 집 아이들이 그랬듯 시내로 이사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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