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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imolove Oct 24. 2021

다시 간다면 '제주'

이제는 웃으며 너를 안아주겠다.

지구의 중심은 자신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 속의 '나'.

1년 전.... 

웃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더는 버틸 힘조차 없다고 여겨져 나를 던지기로 마음먹고 찾아간 곳 제주.

나에 대한 허무를 알게 된 순간 무기력해지고 앞길이 보이질 않았다. 온갖 부정의 단어들은 모두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검푸른 바다 위의 부서지는 파도와 세차게 머리칼을 날리는 바람, 들판의 돌담, 가지마다 영글어가는 감귤의 모습들도 새롭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낄 여유가 없었다.




하루, 이틀.. 계속 걷기만 하다 보니 이제 이곳이 그곳 같고 새로운 명소도 그다지 새롭지 않았다.

그저 걷다가 지치면 잠시 카페에 들러 멍하니 바다를 바라볼 뿐이다. 정처 없이 길을 나서게 되고 눈에 띄는 올레길을 따라 걷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 게 하루의 전부였다.  

3일째 되는 날부터는 비행기표가 아까운 맘이 들기 시작했다. 어디라도 가자, 최대한 많이 걷자, 그래서 무작정 길을 나섰다. 계획에 없던 일정이라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다. 겁이 많아 펜션이나 게스트 하우스는 가보지도 못하고 호텔을 일주일 장박 했기 때문에 먹고 이동하는 비용을 최대한 아껴야 했다. 다행히 식탐이 없던 때여서 배가 고파도 먹고 싶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침에 길을 나서기 전 배낭 안에 챙기는 건 호텔에서 제공하는 생수와 화장지다. 버스로 이동하고 환승하는 것도 배웠다.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호텔에 도착하지 못하면 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배우게 된 것이다. 어플을 사용해서 좀 더 버스비를 아끼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근사한 식사는 꿈도 못 꾼다. 걷다가 지치면 쭉 늘어선 카페들 중에 특별히 담이 없는 오픈된 카페의 야외 테라스를 이용했다. 딱히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고 누가 봐도 카페 이용자 같은 포스였다. 사람이 점점 얼굴이 두꺼워져 가는 듯했다. 그래도 양보할 수 없는 건 잠자리에 들기 전 소주 두병. 제주의 밤바람과 달빛에 검푸른 빛이 나는 바다가 바라보이는 호텔 테라스는 아주 훌륭한 선술집이 된다. 소주 한 모금에 바다향기 한 번들 이마시고 두 모금에 쓰디쓴 눈물 한번 삼켜마시고.... 저렴했지만 나에겐 아주 훌륭한 수면제가 되어주었다.




다시 쏟아지는 햇살에 아침을 맞이하고 생수 한 병 들이키고 오늘은 어디를 갈까 하는 생각도 없이 호텔을 나섰다. 한라산을 향하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갔는데 환승을 해야 하는 정류장이라 내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음 버스가 오려면 1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하는 수없이 근처의 산을 올라가 보기로 결심했다. 밤새 휴대폰 충전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최대한 배터리를 아껴야 해서 길 안내 어플은 켜지를 못했다.

그 탓에 코스를 찾지 못해 계속해서 펼쳐지는 공원묘지 주변만 헤매다가 멧돼지와 마주쳐 기겁을 하고 도망을 치는데 가도 가도 넓은 들판과 그 위를 까맣게 덮은 까마귀 떼의 모습에 실신을 할뻔했다. 지나는 등산객도 없고 인적이 전혀 없었다.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돈내코라고 쓰인 알림표지판이 나왔다. 예로부터 멧돼지가 워낙 많이 출몰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돗은 돼지, 드르는 들판을 가리키는 제주어인데 그 돗드르에서 멧돼지들이 물을 먹었던 내의 입구라 하여 돈내코라 불리고 있다. 나와 멧돼지 사이에 놓인 철조망이 아니었다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아직도 그날 마주쳤던 멧돼지의 눈빛과 나를 향해 퀙퀙대는 괴물 같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죽으려던 사람이 발을 헛디뎌 놀래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라고 말하는 꼴이다. 온통 까마귀 울음소리와 시커멓게 채워진 들판은 천주교 묘지였다. 하루 종일 사경을 헤매다 나온 것만 같아 온몸의 진이 빠져나갔다.

죽겠다고 찾은 제주에서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란.... 그날 밤 죽을뻔한 나에게 살아있어 다행이라며 컵라면에 소주를 마시는 사치를 부려줬다.


절망이라는 끈을 두고 오다


일주일째 되는 날 나의 울음과 몸부림을 안아준 제주를 그대로 놓아둔 채 집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여기 그대로 있어
나를 기억해줘
내가 웃으며 다시 돌아올 테니..


다시 간다면 제주. 그로부터 지금까지 1년. 그 지난 1년 동안 새 살을 돋아내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아픔이 지워지지 않고 상처가 낫지 않았지만  기다릴 여유가 없다. 가슴에 묻고 또 다른 챕터의 삶을 시작한다. 오늘이 내 인생 가장 젊은 날이니까. 제주에 두고 온 나의 절망에게 긍정의 힘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니까.



때론 넘어지기도 하고 , 성공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아프기도, 슬프기도.... 지나고 나면 이겨내지 못할 것 없는 무게였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 이 또한 지나 가리라는 위로를 주는 이를 통해 인내하며 성장하는 법도 배웠다. 한걸음 한걸음 걸음마를 떼는 아이의 손을 잡듯 이끌어 주는 그림자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난 지금도 노력하며 살아간다.

사랑받기 위해 시작했는데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넘어져 울던 나를 보듬어 안아주고 이제 나를 사랑하면서 사는 이야기를 만들어가야겠다. '실패란 넘어진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리에 머무는 것이다'라고 말해주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켜준 사람. 그 사람에게 이 책을 바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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