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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고마르다 Aug 15. 2024

엄마는 마흔이 되기 전에 꼭 아가를 만나고 싶었어

나는 마흔이 되기 전에 아이를 낳고 싶었다.

사실 서른다섯이 넘어서도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물론 결혼도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없다.

그런 내가 어느 날 불현듯 마흔이 되기 전에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우선 결혼부터 해야 했다.

내게는 아주 오래오래 사귄 연인이 있었다.

대학 때 만나 20대와 30대를 함께 보낸 그.

다행스럽게도 그가 있었기에 결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마흔 전에 내 인생 최대 과제를 하나씩 부랴부랴 해치우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패닉에 빠진 서른여덟 겨울, 드디어 결혼을 했다.

내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에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야말로 놀라 자빠지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18년을 사귄 그와 드디어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결혼 소식에 모두들 하나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더 많은 축하를 받았다.


신혼생활 1년간은 아이를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코로나로 인해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기 때문.

내가 결혼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신혼여행이다.

그런데 하필 코로나로 인해 예약해 두었던 스페인 신혼여행은 취소가 되었고 아쉽게도 신혼여행을 잠시 접어두어야만 했다.

그로부터 반년이 흐르고 코로나가 수그러들자 나는 비로소 터키로 늦은 신혼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신혼여행 후 우리의 2세 계획에 불이 붙었고 남들이 다 해보는 그 노력을 나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면 그게 임신일리가 없지.

역시나 6개월의 노력은 성과를 보지 못했고 결국 마흔이 된 다음 해 1월, 나는 난임병원을 찾았다.


내가 난임병원을 찾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간절히 원했고, 내 나이는 이미 마흔이니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검사라도 받아보아야 훗날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난임검사 결과 다행스럽게도 둘 다 건강했다.

하지만 건강하다고 해서 임신이 바로 되는 게 아니기에 시간이 갈수록 더욱 초조해져만 갔다.

그 무렵 이미 내 주위 친구들의 대부분이 시험관시술을 통해 임신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내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그러던 중 나는 어차피 병원을 다니면서 초음파를 계속 보며 임신시도를 해야만 할 것이고

그러기에는 비용이 들어가기에 어차피 병원 다닐 거 인공수정이라는 의술의 힘을 빌려보기로 했다.

아이를 간절히 원하지만 시험관시술은 아직 무섭고, 인공수정은 그나마 마음먹은 김에 해볼 만하다고 여겨졌다.

물론 나는 약과 주사를 사용하는 과배란 인공수정이 아닌 자연주기 인공수정을 결정했다.

그만큼 과배란 인공수정 시술은 자신이 없었고 내 몸이 버텨줄지도 의문이었기에 우선 생소했던 난임병원과 친해지면 그나마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시술을 받기로 했고, 그 첫 단계가 바로 자연임신과 별 차이 없는 자연주기 인공수정이다.

말 그대로 가벼운 마음으로, 워밍업 차원에서 자연주기 인공수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연주기 인공수정은 내 배란일에 맞춰 정자만 넣어주는 시술이었기에 내 몸에는 아무런 무리가 가지 않았다.

단순히 난임시술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 맛보기용이었던 시술이었기에 어떤 스트레스도 받지 않았고

그냥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시술을 받고도 거의 잊은 채 지냈다.

그런데 그런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생활이 오히려 도움이 된 것 같다.

결과는 한 번에 성공!

나의 간절함이 통한 것인지 그게 아니면 임신이 될 운이었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게 되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마흔 딱 중반에 임신을 하게 되었다.


마흔이 넘어 아이를 낳으려니 덜컥 겁이 났다.

그러던 찰나에 들려오는 만 나이 통일.

뭐라고?? 나 다시 서른아홉으로 돌아간다고??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게 서른아홉 임산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흔을 한 달 앞두고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극적으로.

나라에서 한 살을 깎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마흔 하나에 아이를 낳았겠지.

마흔이나 서른아홉이나 똑같은 거 아닌가 하겠지만 나에게 마흔이란 무언의 압박 같은 게 느껴지는 나이였다.

그래서 이왕이면 마흔 전인 30대에 아이를 낳는 게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어찌 됐건 나는 생일이 다가오기 전, 마흔을 고작 한 달 앞두고 아이를 낳았고 나의 인생 최대 과제는 대성공이다.


임신과 출산 과정을 겪고 보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과연 사실이었다.

나는 흔히들 말하는 나이 많은 노산이었지만 고위험산모도 아니었고 임신하고 체중도 7kg밖에 증가하지 않았으며 입덧도 약으로 버틸만한 정도였고 모든 게 순조로웠다.

출산도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으나 20대 산모 못지않은 빠른 회복력으로 병원과 조리원에서 보는 사람마다 회복이 빠르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물론 집으로 돌아와 아기를 키우면서 손목과 허리, 어깨는 아팠지만 그것도 한 달 남짓이었으며

모유수유도 비교적 수월하게 하고 있고, 평소 앓던 병이라면 병이었던 질병들도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

나를 고통스럽게 따라다니던 소화불량, 편두통, 장염, 이명, 메니에르병, 생리통 등이 출산과 함께 한 번에 날아가버렸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꼭 내가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이를 낳고 나서 더없이 행복했고 지금도 그 행복은 더 커져만 가고 있다.


어느 누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마흔이 되기 전에 마음먹은 대로 아이를 낳은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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