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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기 Oct 26. 2022

6회 말 투 아웃, 불꽃 슬라이딩


    흥타령기 전국 유소년 야구대회가 시작되었어요.

    그런데 이름만큼 흥이 터지지는 않았어요. 연습 경기 때와 마찬가지로 저는 거의 경기에 나가지 못했어요. 그래도 연습 경기 때는 대주자로 가끔 나가긴 했는데 (쉿! 비밀 변기로요) 이번 대회에서는 아직 한 번도 나가지 못했어요. 그래도 응원은 열심히 했어요.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요.


    드디어 (헤이!)

    나왔구나 (헤이!)

    드디어 나왔구나 우리 팀의 (헤이!)

    안타 머신 (헤이!)

    그 이름도 유명한 최수혁 (박이현!)


    "야, 최수혁이라고 해야지. 그렇게 나가고 싶냐?"

    저도 모르게 그만. 아무튼 비밀 변기라고 하더니 진짜 진짜 비밀인가 봐요. 이렇게까지 꽁꽁 숨겨 놓는 거 보면.


    그래도 우리 팀이 계속 이겨서 좋았어요. 해진초 야구부는 진짜 최강이에요. 형들은 짱짱맨이고요. 우리가 결승에 진출했어요! 결승전은 대회 마지막 날 열린대요. 상대는 섭교초. 이름은 섭섭하지만 실력은 결코 섭섭하지 않은 전국 최강 섭교초. 나왔다 하면 우승이래요. 근데 더 큰 문제는 우리 팀에 부상이 너무 많아요. 태진이 형 팔꿈치, 찬우 형 발목, 승겸이 형 종아리, 윤진이 형 햄스트링, 결정적으로 우리의 캡틴 수혁이 형이 준결승에서 발목을 접질렸어요. 타격은 가능한데 뛰기는 어려울 것 같대요.

    "홈런 치면 되니까 걱정 마."

    와, 이 형 진짜 뭐죠? 이렇게까지 멋져도 되는 건가요? 그래도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이제 출전할 수 있는 후보 선수는 기훈이 형이랑...... 나? 헉! 나! 아 어떡하죠. 경기에 안 나가도 걱정, 나가도 걱정이에요.


    드디어 결승전이 있는 날이에요.

    경기 시작 전 우리 팀 선수들이 모두 그라운드에 둥글게 모였어요. 감독님이 말씀하셨어요.

    "져도 돼."

    엥?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우리는 우리 야구를 하자. 그러면 돼."

    진짜 멋쟁이 신사! 감독님이 되려면 말도 저렇게 잘해야 하나 봐요. 가만, 근데 우리 야구가 뭐지...... 하는데 수혁이 형이 외쳤어요.

    

    최강 해진! 워이!

    가자아!


    섭교초는 과연 강했어요. 실수가 없었고 우리 실수를 놓치지 않았어요. 막아야 하는 점수를 막고 내야 하는 점수를 낼 줄 아는 팀이었어요. 그렇지만 우리 해진초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어요. 형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어요. 몇 번이나 넘어졌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섰어요. 자꾸만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어요. 왠지 부끄러워서 형들 눈치를 보았는데 형들도 급하게 고개를 돌리거나 괜히 하늘을 봤어요. 뜬 공이 나온 것도 아니었는데.


    경기는 이제 마지막 6회 말, 해진초 공격. 점수는 6대7 한 점 차로 지고 있어요. 이번에 점수를 못 내면 그대로 끝이에요.

    선두 타자는 승겸이 형. 선두 타자 출루가 무엇보다 중요해요. 그런데 종아리 부상이 있어서 잘 뛸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침착하게 볼을 잘 골라내면서 풀카운트까지 갔어요. 역시 승겸이 형.

    제6구...... 볼!

    "스뚜우롸익 아웃"

    아, 뭐죠? 분명히 빠졌는데! 볼넷이었는데...... 심판이 삼진 아웃을 선언했어요.

    "우와악! 그게 어떻게 볼이야아!"

    기훈이 형이 소리를 질렀어요. 심판, 코치님, 감독님이 동시에 잡아먹을 듯이 쳐다봤어요. 기훈이 형은 그래도 참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요.

    "완전 빠졌잖아요! 볼이잖아요! 태평양 존이에요? 퇴근 콜이에요? 진짜 너무하잖아요!"

    코치님, 감독님이 말려도 소용없었어요. 기훈이 형은 진짜 완전 싸움닭이에요. 결국 퇴장 명령이 내려졌어요. 형들이 기훈이 형을 데리고 나갔어요. 기훈이 형은 나가면서까지 울보 불고 소리를 질렀어요.

    "사기다, 사기! 승부 조작이다아! 우와아아아악!"

    심판과 감독님이 한참 이야기를 하고 다시 경기가 진행되었어요. 기훈이 형이 퇴장을 당했지만 오히려 더그아웃 분위기는 달아올랐어요. 아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형들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게 느껴졌어요. 그 열기는 그대로 그라운드에 있는 선수들에게 전해졌어요.

    건호 형, 수혁이 형이 연속 안타를 치고, 윤진이 형이 진루타를 쳐내면서 2사에 2, 3루 끝내기 상황이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그때 2루 주자 수혁이 형이 갑자기 주저앉았어요. 감독님과 코치님이 뛰어갔어요. 더그아웃에 있던 선수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어요. 그 바람에 저는 대체 무슨 일인지 보이지 않았죠.

    "형, 뭐예요? 무슨 일이에요? 안 보여요. 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어요. 나쁜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는 건 알 수 있었어요. 코치님이 수혁이 형을 업고 더그아웃으로 왔어요. 감독님이 이쪽을 쳐다보셨어요. 저도 감독님을 쳐다보았어요. 평소에는 감독님이 쳐다만 봐도 눈을 피했는데,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몇 초 후 감독님이 심판에게 말씀하셨어요.


    "대주자, 17번."


    행운의 77번 헬멧을 쓰고, 벨트를 한 칸 더 바짝 채웠어요. 뛰어 나가려는데 승겸이 형이 자기 주루 장갑을 손에 끼워 주었어요. 도루왕 김혜성의 주루 장갑!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와 2루로 달려 나갔어요. 그 순간,


    드디어 (헤이!)

    나왔구나 (헤이!)

    드디어 나왔구나 우리 팀의 (헤이!)

    주루 머신 (헤이!)

    그 이름도 유명한 박이현 (박이현!)


    응원가는 몇 번이고 계속되었어요.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에 제 이름이 있었어요. 그 간절한 외침이 저를 향하고 있었어요. 귀가 뜨거웠어요. 빨갛게 되었을 거예요. 헬멧에 가려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감독님이 제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씀하셨어요.


    "깡하면 뛰는 거야. 알지?"

    너무 긴장해서 대답하는 것도 까먹었어요.

    "대답해야지."

    "......아, 네."

    "크게에!"

    정신이 돌아왔어요. 깡하면 뛰는 거예요. 우리 야구를 보여줄 차례예요!

    "스으으읍, 네에에에에에!"

    우와아아아악! 형들도 같이 소리를 질렀어요. 감독님이 웃으면서 뭐라고 말씀하시고는 헬멧을 툭툭 치고 가셨어요. 듣지는 못했어요.    


    6회 말, 투 아웃 2, 3루.

    점수는 한 점 차.


    타석에 우재 형이 섰어요. 한 방이면 동점, 잘하면 경기를 끝낼 수도 있는 상황.

    "이현아, 더 더 더!"

    코치님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리드 폭을 점점 넓혀 갔어요.

    "견제!"

    "빽!"

    "세이프!"

    후아아, 겨우 살았어요. 승겸이 형 주루 장갑이 없었다면 그냥 아웃될 뻔했어요.


    하나 둘 셋 (마!)

    둘 둘 셋 (마!)


    더그아웃에서 형들이 소리를 질렀어요.

    투수가 모자를 벗고 땀을 닦았어요. 로진을 잡았다 놓쳤다 다시 잡았어요.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어요. 저는 리드 폭을 넓혔어요.

    드디어, 초구!

    볼.

    환호성과 탄식이 동시에 터져 나왔어요.

    제2구, 헛스윙! 1볼 1스트라이크.

    재빨리 2루로 돌아갔다가 다시 리드를 시작했어요.

    3구, 볼.

    "잘 본다!" 박수가 나왔다가 금방 조용해졌어요.

    "빽!" 다시 견제! 이번에는 넉넉히 세이프. 흥, 어딜!

    4구 타격, 파울.

    볼카운트 2볼 2스트라이크.

    제5구 던졌습니다!


    깡!


    "뛰어어어어어어어!"

    우다다다다다다다다!

    사실 이때부터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요. 3루를 향해 뛰었고, 풍차처럼 팔을 돌리는 감독님을 보고는 크게 돌아 홈을 향해 뛰었...... 헉헉, 우다다다다다다다! 헉헉헉...... 하얀색 홈플레이트가 보이고, 그 앞에 포수가 송구를 잡는 것 같은 동작을 하고, 다음 타자... 누구였지? 암튼 누구 형이 두 팔을 들어서 땅에 엎드리는 동작을 반복하며 슬라이딩이라고 외치는 것 같았는데...... 포수가 공을 잡아 내 쪽으로 미트를 빠르게 뻗으며 태그 동작을...... 내가 부우웅 몸을 날리며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악!


    세이프!

    아웃!


    1루와 3루 쪽 더그아웃에서 각각 다르게 소리를 질렀어요. 저는 포수와 강하게 부딪히면서 튕겨나가는 중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심판을 쳐다보았어요. 심판의 동작이 슬로 모션처럼 보였어요. 두 팔을 펴는 건가? 주먹을 쥐는 건가? 아? 아아......


    "와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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