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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기 Oct 26. 2022

비밀 변기 훈련


    훈련이 끝났는데, 아니 끝난 줄 알았는데 감독님이 부르셨어요.

    "이현이 2루로 가. 호준이 투수 하고."

    감독님이 타석에 서서 말씀하셨어요. 

    2루로 뛰어가려는데 수혁이 형이 헬멧 쓰고 가야지 하면서 헬멧을 줬어요. 행운의 77번 헬멧! 실은 17번인데 77번으로 잘못 왔어요. 그래도 좋아요. 행운의 7이 두 개나 있으니까요. 모자를 벗어 다리 사이에 끼고 두 손으로 헬멧을 썼어요. 수혁이 형이 제 모자를 가지고 더그아웃으로 달려갔어요. 형은 어쩜, 저렇게 멋질까요? 헤벌쭉 웃으면서 형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감독님이 소리쳤어요. 

    "얼른 안 뛰어가!"

    깜짝이야. 얼른 뛰어서 2루를 밟고 섰어요. 코치님이 제 엉덩이를 툭툭 쳤어요. 

    "이현아." 감독님이 말씀하셨어요. 

    감독님을 쳐다봤어요. 또 헤벌쭉―

    "대답해야지."

    "네."

    "크게!" 

    "네에!" 

    감독님이 크크 하고 웃으셨어요. 

    "잘 들어어. 지금 6회말 2아웃이야. 타자가 쳤어. 어떻게 해야 돼?"

    (*유소년 야구는 6회까지 해요.)

    "타구 보고 안타면......"

    "뛰어야지이!"

    헤―

    "뛰어야지. 2아웃이면 깡하면 뛰는 거야아!"

    "네."

    "크게!"

    "네에에에!" 

    형들이 와하하 웃었어요. 

    "깡하면 뛰는 거야!" 

    "네에에에!"

    "호준아, 투구해 봐. 모션만...... 아니지이. 득점권 주자 있으면 어떻게 해야 돼? 그래. 슬라이드 스텝으로 해야지. 이현이 리드해야지. 더, 더, 더. 그렇지, 됐어. 집중하고."

    으으으으, 배꼽이 간질간질. 에라 모르겠다. 출바알!

    "견제!" 감독님이 소리치니까 호준이 형이 빙글 돌아 견제 동작을 했어요. 

    "아웃." 코치님이 오른팔을 들며 말씀하셨어요. 

    "이현아, 집중해야지. 집중!" 감독님이 말씀하셨어요.

    무조건 뛰랬으면서 치사하게. 

    "내가 언제 무조건 뛰랬어? 깡하면 뛰어야지. 깡하면!"

    흐익. 속으로 말했는데... 설마 들으신 건 아니겠죠? 

    "자, 다시! 투수 세트포지션. 이현이 리드하고, 더, 더."

    으으으으―

    "던졌다!" 

    감독님이 가지고 있던 공을 가볍게 띄워서 깡 쳤어요. 어라? 유격수 정면으로 가는 땅볼인데?     

    "뛰어야지이!" 감독님이 소리쳤어요.

    깜짝 놀라서 냅다 뛰는데, 감독님이 다시 돌아가라고 하셨어요. 

    "이현아, 2 아웃에서는! 깡 하면! 무조건 뛰는 거야아! 타구 볼 필요도 없어어!"

    "네."

    "알겠어어?"

    "흐으읍, 네에에에!" 더그아웃에서 형들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웃었어요.

    "자, 다시! 투수 세트포지션. 리드해야지, 리드. 그렇지."

    깡하면 뛴다, 깡하면 뛴다, 깡하면 뛴다......

    "던졌다!"

    깡―

    "우다다다다다!" 입으로 소리를 내면 발이 빨라져요! 

    "더 빨리, 더 빨리, 계속, 계속, 계속! 공 온다, 온다, 슬라이디이이잉!"

    와다다다다다닷! 

    

    "세이프!" 

    감독님이 양팔을 옆으로 촥 벌리며 소리쳤어요. 

    "나이스 다리!" 

    형들이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질렀어요. 너무 신나서 집에서 연습했던 엉덩이춤 세리머니를 할 뻔했지 뭐예요. 그럼 이제,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서 형들이랑 하이파이브를......

    "야, 어디 가아? 2루로 다시 가야지." 감독님이 말씀하셨어요.

    아. 다시 2루로 뛰어갔어요. 


    그렇게 한 열 번도 넘게 주루 연습을 했어요. 형들 말로는 제가 '비밀 변기'래요. 내가 '변기?' 하면서 인상을 쓰니까 형들이 '좋은 거야, 애기야." 하면서 웃었어요. 형들이 좋은 거라니까 좋은 변기인가 보다 했죠, 뭐. 그렇지만 다리가 너무 아팠어요. 변기에 오래 앉아 있었던 것처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어요.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그대로 뻗어 버렸어요. 아빠랑 놀지도 못하고. 속상하게. 


    다음 날에도 비밀 변기 훈련을 했어요. 뛰고 뛰고 또 뛰고 계속 뛰고. 

    우다다다다다다다다다.

    힘들었지만 감독님한테 칭찬도 듣고, 형들도 '어제보다 더 좋은 변기가 되었다'며 하이파이브를 해 주었어요. 기분이 좋으면서도 좀 꾸리꾸리 하고, 그래도 웃기긴 했어요. 


    저녁에 아빠랑 차에 탔는데 아빠가 부스럭 부스럭 하더니 가방에서 뭔가 꺼냈어요. 

    "짠!"

    "읭? 이게 뭐야?" 

    "에구우 우리 아들, 이게 그렇게 먹고 싶었쪄?" 

    잘 안 보여서 실내등을 켜 보았어요. 아니 갑자기 이걸 왜......

    "어제 니가 자면서 '깡 하나만 깡 하나만......' 하면서 잠꼬대를 하더라고." 

    아―

    어쨌든, 아빠랑 새우깡을 먹으면서 집으로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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