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한가운데/루이제린저/육문사/2000
1.
살면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을 물을 때마다 주저 없이 이야기했던 책.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니나'는 신화 같은 인물이었다.
그랬던 니나가 내 기억 속에서 옅어지기 시작했고, 내게 생이 지니는 의미도 차츰 옅어져 갔다.
2.
그래, 하고 나는 아직도 경악한 채로 말했다. 너는 강하니까 생이 너에게는 그런 걸 허가할 수 있겠지만 다른 여자라면...
- 나는 다른 여자가 아니야. (57)
그래야 하니까. 그러지 않을 수 없는 필연 때문이야. 사람들은 모두 니나 붓슈만은 현대적인 여자라고, 해방된 여자의 모범적 예라고 생각하고 있어. 자기와 자기 아이들의 생계를 혼자서 벌고 있고, 남편을 필요로 하지 않고, 남자처럼 사고가 명료하고 남자처럼 대담하게 생을... 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러나 그건 모두 나의 일부분에 불과해. (219)
니나는 그래야 하니까. 그렇게 규정지어졌으니까... 누군가를 정의 내리는 일만큼 위험한 일이 또 있을까?
3.
그의 아내는 선량하고 총명한 여자였으나, 아마 간호원처럼 정확하고 친절하지만 남자에게 꿈을 줄 수 없는 종류의 여자들에 속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 세상에는 그런 여자가 많아. (94)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가 전혀 없는 자연아이고 대담스럽게 굴고 건강하고 성공하기에 필요할만한 지성을 가진 남자다. 그러면서도 좋은 인간이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종류의 인간이다. 틀림없이 자기 또래의 청년들한테는 좋은 동료일 것이다. 아무것도 감출 것이 없으니까 솔직하고, 아무 어려운 문제가 없으니까 명랑하고, 요새 여자들이 좋아하는 뚜렷한 남성미의 소유자다. 한 마디로 통찰력이 없고 신비함이 없고 사고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233)
그런 여자, 평범한 사람.
'좋은 인간'의 기준은 뭘까?
4.
우리들이 서로 해후하긴 하지만 결코 상대방이 있는 그 피안의 영역에의 문지방을 넘어설 수는 없어. 당신은 내 생을 인정하지 않을 거야. 그것은 당신 것과는 달랐으니까. (316)
어떤 사람에게 속을 털면 털수록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는 침묵 속의 공감이라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111)
법정 스님의 수필이 생각난다.
-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오해합니다.
5.
나는 내가 슈타인의 이미 시효가 지난 고통이나 니나의 자살적인 작별에 대해서만 우는 것이 아니고, 내 생에서 처음으로 나 자신에 대해서, 또 마치 젖은 잿빛의 촘촘한 그물과 같이 얽힌 나 자신과 모든 인간의 숙명 때문에 울었다. 누가 과연 이 그물을 찢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비록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이 그물은 여전히 발에 걸려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끌고 다닐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보기에는 아무리 얇은 것 같아 보여도 감당하기에 어려운 무거운 짐일 수밖에 없다. (317)
나 자신과 모든 인간의 숙명. 내 발에 걸려 있는 그물. 무겁다...
다시 읽어도 여전히, 내 생에 최고의 책.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사랑은 언제나 기다림과 연결되어 있었어. 편지를 기다리고, 기차를 기다리고, 그의 이혼을 기다리고, (..) 아, 맙소사, 그것은 기다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 그러고 나서 언니는 행복했어? 전보다, 언제나 기다려야 했을 때 보다 행복했어? (35)
내가 죽어야 한다면 알고 싶습니다. 죽음은 중요한 일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기겠을 단 한 번밖에 체험하지 못하는데 왜 의식도 없이 받아들여야 하나요? 마치 도살당하기 전에 머리를 얻어맞는 짐승과도 같이...... 나는 깨어있고 싶어요. 나는 그것을 알고 싶어요. (42)
왜냐하면 기록한다는 것은 사정없는 날카로움을 가지고 상기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서 그것을 해야 한다. (76)
독자는 오락을 요구하고 있어.(...) 마치 극장에서처럼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게 진해오디어 가야 돼.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기가 사실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어. 인생에서는 어떤 계산도 들어맞는 법이 없고 아무런 결말을 갖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결혼은 결말이 아니고 죽음도 다만 외관상의 결말에 불과해. 생은 계속해서 흘러가는 거야. 모든 것은 그렇게도 혼란하고 무질서하고 아무 논리도 없고 모두 즉흥적으로 만들어지고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서 작은 조각을 끌어내서 현실에서 있을 수 없고 생의 복잡성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인 조그마한 구도를 가지고 구성하고 있어. 모두가 다 꾸며진 사건에 불과해. (132)
어떤 경우에도, 언제나 살인은 살인이라는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당신 같은 양심 없는 사람들일 테지요!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들은 법으로 가장하고 죽이기를 한 번 시작하면 다음에는 합법이든 불법이든 죽이고 또 죽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살인자들만 남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그것에 반대하기를 그치지 않겠어요. 나는 끝까지 반대하겠어요. 그리고 살인을 허용할 뿐 아니라, 그것에 필요성과 선의의 가장까지 붙여 주는 국가를 절대로 시인하지 않겠어요. (173)
인간을 다른 인간을 위해서 희생시키고, 어떤 인간은 가치 있다고 부르고 또 한 인간은 무가치하다고 부르는데, 도대체 그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단체에 대한 유용성은 나에게는 아무런 기준도 못돼요, 결코. 사람은 각기 가치를 내면에 지니고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희생을 받는 사람은 그럼 가치가 있을까요? (184)
니나는 나를 바라보았다. 생을 사랑한다고요?라고 니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당신을 통해서 생을 사랑하는 거예요.
맹목적인 고통과 정열에 찢겨 있던 나는 외쳤다. 그러나 나는 생을 너의 안에서 사랑한다. 다만 너의 안에서만. 너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생을 사랑한다. 그것이 우리들 사이의 차이야, 무서운 차이야. (187)
나는 그게 어떤 것인지 알고 있어. 사람이 완전히 고독하게 앉아서 결코 다시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영원히 다시는 한 사람과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 지옥일 거야. (205)
생은 힘든 거야. 함정과 어둠에 가득 차 있고 행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어. 모든 것이 거짓말이야. 환상이야. 아무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 그는 나에게 고통에 넘친 시선을 던졌어. (226)
나는 살고 싶어요. 생의 전부를 사랑해요. 그렇지만 내 이런 마음을 당신은 이해 못하실 거예요. 당신은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생을 피해 갔어요. (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