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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가 Sep 1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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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년일 때 영화를 보는 일은 일기를 쓰는 일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기록한 영화감상문은 내 일기의 전부가 됐습니다. 나에게 영화란 그런 것입니다.


나는 어느새 자라 서른을 훌쩍 넘긴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행동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심지어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영화를 보는 일만큼은 어렸을 때와 다름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매일같이 영화를 찾고 영화를 만나고 영화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볼 때면 제 자신이 소년에 머물러있는 듯합니다.


내 나이 서른여덟이지만 솔직히 아직 어른은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친구들은 일찍이 사회로 나가 직업을 구하고 일을 하며 가정을 꾸리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멋지게 나이를 더해가는데 내 생에 수북이 쌓인 것이라고는 오직 영화와 일기뿐이라서 아직 직업도 변변치 않고 통장 잔고도 비어있으며 연애는커녕 부모님께 효도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다 제 탓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저 영화를 보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이 좋아서 어쩌다 영화와 글이 생략된 하루 끝에는 깊은 우울감에 잠깁니다. 그만큼이나 영화는 나에게 살아갈 힘이 됩니다.


하루는 길에서 마주친 사람이 나에게 대뜸 직업이 무엇이냐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공부를 하는 분이라길래 나는 고심 끝에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 답했습니다. 영화평론가부터 시나리오작가까지 그분이 생각하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직업으로 재차 되묻길래 나는 다시 '그냥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 답했습니다. 그때 난 영화를 보는 일이 직업이라면 내 직업은 영화를 보는 일로 정해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직업을 정말 저의 일로 삼아볼까 합니다.


확실친 않지만 제가 무척 좋아하는 영화감독 프랑소와 트뤼포가 인터뷰 도중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좋아하는 영화를 두 번 세 번 더 보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그 영화에 대한 평을 써보는 것이며, 세 번째 방법은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이 조언을 따르고는 있지만 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 말고 쓰는 사람에 머무르고 싶습니다. 어쩌면 먼 훗날 좋은 시나리오 한편을 완성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땐 저도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 합류해 엔딩 크레티트에 이름을 남기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창작'보다 '감상'에 집중하며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영화 일기에 관한 책을 써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소년 시절부터 영화를 일기로 남겼으니 그 기록이 제법 많이 모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나 소년이었을 때 만난 소년들의 영화와, 나 다시 소년이 되고 싶어 찾은 소년들의 영화를 추려보기로 했습니다. 그 시작은 꼭 배우 장국영이 나오는 영화였으면 했는데 그는 청년 시절 데뷔한 터라 소년 시절이 담긴 영화가 없어 너무나 아쉽습니다. 그래도 미성년을 연기한 영화 [실업생]을 목록에 더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찬찬히 잘 살펴볼까 합니다.


내 소년 시절의 전부가 되어준 영화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써보겠습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소년들과 소년들을 사랑하는 영화를 위해, 그리고 어른이 되고 싶은 소년들과 다시 소년이 되고 싶은 어른들을 위해, 앞으로 소년답게 영화를 남겨보겠습니다. 그리고 나답게 일기를 써보겠습니다. 그럼 오프닝 타이틀을 올려봅니다. 저의 데뷔작이 될 '소년영화백서'를 시작합니다.

 


_ 영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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