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판타스틱 데뷔작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 / 소년, 리
나의 어린 시절 주인공은 너였어.
★★★☆
초등학생 시절 수업시간 도중 공책에 네 컷 만화를 그리다 선생님한테 혼난 적이 있다. 짝꿍은 내가 그린 만화를 몰래 훔쳐보다 들켜 같이 혼이 났다. 우리는 복도로 쫓겨나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들고 있으라는 벌을 받았는데 서로를 힐끔거리다 동시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 뒤로 짝꿍은 내가 그린 만화의 첫 독자가 되어주었다. 어쩌면 그날이야말로 내가 데뷔한 첫날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은 극장에서 몰래 해적판 영화를 찍는 소년 리(윌 포터)와 화장실에 숨어 그림을 그리는 소년 윌(빌 밀너)이 만나 데뷔작 'Son of Rambow'를 만드는 과정을 다룬다. 이 발칙한 친구들은 영화 [람보]의 정신을 이어받아 위험천만한 스턴트를 직접 소화하기에 이르는데, 하루는 촬영 도중 호수에 빠진 윌을 리가 구해주게 되면서 둘은 의형제를 맺기에 이른다. 그 후 리와 윌은 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이 된다.
한창 겁 없을 나이. 그건 더도 덜도 말고 모든 게 단순하게 여겨졌던 어린 시절이 아닐까. 순수한 건지 순진한 건지 모를 정도로 그때의 우리는 죽기 살기로 서로를 따랐고, 친구의 말이라면 뭐든지 믿어 의심치 않는 그런 맹목적 우정이 가장 진실했던 순간이 그때였으니까. 따지고 보면 내 어린 시절의 추억 역시 온통 친구라는 존재로 가득했고 내 초등학생 시절을 영화로 만든다면 주연은 내가 아닌 나의 단짝이었을 게 분명하다. 리가 자신의 영화에 윌을 주연으로 출연시킨 것처럼 말이다. 그땐 정말이지 우리 모두 겁이 없었다. 겁이 없으니 '난 너만 있으면 된다'는 진심을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을 것이고, 그러니 윌과 리의 '의형제 맺기'는 약속보다 맹세에 가까운 결의였을 테다.
소년 리의 주변에는 사람이 적다. 영화관에서도 리는 관객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혼자 불량스럽게 담배를 피워댈 뿐이다. 가족이라고는 유일하게 형 하나인데 형은 동생이 수업에 빠지든 담배를 피우든 나몰라라는 식으로 리에게 무관심하다. 학교에서는 나쁜 짓만 일삼아서 그런지 교실에서 공부하는 시간보다 복도에 앉아 벌을 받는 시간이 많다. 게다가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복도 끝에서 마주친 윌이 전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윌보다 리의 심정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내가 리처럼 악동의 자질을 갖추고 있던 건 아니지만 마음 둘 곳 없어 성격이 뾰족하게 모나 있던 모습은 어딘가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나는 윌처럼 주변에 사람이 적었다. 사람이 적어서 사람을 어떻게 대할 줄 몰라 뾰로통하게 앉아 혼자서 네 컷 만화를 그렸다. 내가 그린 만화를 슬쩍 훔쳐보던 그 친구 덕분에 나에게도 단짝이 생겼고 그때부터 나는 좀 둥글둥글하게 친구를 하나 둘 더해갈 수 있었다.
리는 윌과 만나 친구 관계의 진폭을 오르내린다. 속 깊은 얘기를 나누는 소중한 시간들로 상승하다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교환학생 디디에르가 윌의 환심을 사게 되면서 하강한다. 시기와 질투에 눈먼 리는 끝내 윌에게 절교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다 큰 어른들에게 절교라는 건 철부지였을 때 몇 번 입 밖으로 내뱉었던 민망한 낱말일지 몰라도 아이들에겐 다르다. 결코 한낱 낱말이 아니다. 교제를 끊겠다는 그 냉혹한 의미를 몸소 체감하며 처절하게 내뱉는 진심이자 마음속 친구라는 섬 하나가 무너져내리는 재난인 것이다. 그만큼이나 이 관계에 진심이었던 리는 절교를 선언한 뒤에도 위기에 처한 윌을 두고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윌을 구해낸 리는 혼자였던 시간으로 담담히 되돌아간다. 자신의 세상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친구의 세상을 지켜준 리를 보면서 나는 한 단계의 성숙을 배웠다. 용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던 그 시절의 나를 돌이켜 보니 리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크고 단단하더라.
소년 윌의 주변에는 어른이 많다. 학교에서는 선생님, 집에서는 가족, 밖에서는 종교단체의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정작 제 생각과 마음을 공유할 또래 아이들에게는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해 혼자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니 그림은 윌에게 하나의 언어였을 것이다. 그 언어를 읽어낸 건 말썽 피우다 복도에서 벌을 받던 리다. 후에 윌은 리의 집에서 함께 본 영화 [람보]에 영감을 받아 제 꿈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 모든 게 리를 만나서 일어난 일이다.
윌은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걸 모른다. 다만 윌이 커가는 과정에서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애가 될지 잘 안 듣는 나쁜 애가 될지 주목하고 판가름할 따름이다. 그중에서도 엄마의 주변을 맴돌며 윌을 감시하는 형제회의 어른 죠슈아가 대표적이다. 그는 윌에게 교육자가 되어주고 싶다며 성큼성큼 다가오지만 감시자로서 윌에게 겁을 주기 일쑤다. 무서운 어른들에게 둘러싸인 윌이 선뜻 자신의 그림을 내어 보여줄 수 있는 건 결국 엄마도 조슈아도 아닌 친구 리뿐이다. 침대에 누워 그림을 그리던 윌은 엄마가 들어오자 그림을 숨겨버리지만 리에게만큼은 숨기지 않는다.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지금껏 함께 지낸 어른이 아니라 바로 며칠 전 복도에서 만난 친구일 테니까. 리로 인해 윌은 꿈을 키우고 꿈의 주인공이 되어 함께 판타스틱 데뷔작을 완성하게 된다.
한참 어른이 된 지금에도 나는 아직 소년티를 벗어내지 못하고 있다. 초등학생 시절을 함께 보낸 단짝이 곁에 남아있진 않지만 내가 보고 쓰는 영화의 언어를 알아봐 준 친구를 위해서, 내 꿈을 키워주고 지켜주는 친구를 위해서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을 만들기 위해 여전히 노력 중이다. 언젠가 그 데뷔작이 나오는 날 나도 리처럼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싶다.
This is be my best day on top.
오늘이 내 생애 최고의 날이야.
요즘 나는 소년의 마음가짐으로 소년의 영화를 보고 소년의 글을 남기는 중이다. 그러니 영화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의 리와 윌처럼 제목 'Son of Rambo'를 'Son of Rambow'로 쓰는 귀여운 실수가 있더라도 웃어 넘겨줄 것이라 믿는다. 실수투성이에 많이 엉성하더라도 이건 어디까지나 소년의 첫 데뷔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