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난 작가들은 틈만 나면 글을 썼다고 하던데 나는 그래본 적이 있었나. 아니. 내가 그렇지 뭐.
한 가지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보면 하루는 온통 그것으로 채워진다던데 내 하루는 그렇지 못하다. 가끔 드라마 정주행이나 해리포터 시리즈에 빠지면 모를까 생산적 활동으로 채워진 적은 글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는 것 같다. 하루동안 글을 건너뛰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만큼이나 내 의지는 나약해서 결심은 쉽게 무너진다. 생계 활동 끝에 집으로 돌아오면 몸뚱어리는 녹초가 되고 정신력은 바닥을 친다. 겨우 샤워를 하고 나오면 이불로 기어들어가 머릿속에 맴돌던 글쓰기는 내일로 미루기 십상이다. 그렇게 글을 건너뛴 다음날이면 자괴감에 빠져 '역시 난 안돼'라며 부정적 사고에 지배당한다. 이 악순환은 며칠간 지속되는데 겨우겨우 헤어 나올 수 있는 의지를 다질 때면 영화 [싱 스트리트]를 튼다.
코너는 틈만 나면 기타를 친다. 영화의 시작에 코너는 방구석에 앉아 기타를 쥐고서 노래를 부른다. 거실에서 부모님이 다투는 소리가 들려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 다툼은 코너에게 가삿말이 된다. 그만큼 코너는 재주가 뛰어난 소년이다. 불운한 가정사라면 나도 뒤지지 않는다. 몸이 불편한 엄마 그리고 술독에 빠진 아빠. '병'과 '술'이 범람하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노를 저을 수 있는 사람은 어린 아들 하나였다. 휘청거리는 가족을 지탱하다 보면 깊은 밤이 찾아왔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쓰던 어린 날의 일기는 하루 이틀 더해질수록 똑같이 아픈 단어와 똑같이 아픈 문장으로 반복됐다. 그 수많은 일기는 도돌이표 문단으로 가득 찬 필사노트가 되었다. 이처럼 내 굴복의 일기는 코너의 가삿말과 사뭇 달랐다. 내가 깊이깊이 가라앉을수록 코너는 높이높이 헤엄쳐 올랐다. 틈만 나면 새로운 가삿말을 쓰고 노래를 부르던 코너의 학교 생활만 보더라도 그 녀석은 나보다 많은 부분에서 앞선 소년이다.
교칙으로 검정 구두를 고집하는 백스터 수사에게 코너는 구두 살 돈이 없다며 핑계를 둘러댄다. 철없어 보일지라도 코너는 제 스타일을 지키기 위해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수사의 괴팍한 성미에 못 이겨 코너는 끝내 황갈색 로퍼를 검게 칠하고 등교하지만 염색과 화장으로 한번 더 수사에게 대항한다. 이때 영화는 코너를 규율을 무시하는 양아치로 몰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억압하는 어른들에 맞서 무엇이든 펼쳐 보이려는 '아이돌'로 보여준다. 코너는 자신의 스타일과 착장물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소년이다. 어쩌면 그래서 대조적인 양아치 베리를 등장시킨 것일 테다. 나는 그런 베리에게도 묘하게 마음이 쓰인다. 학창 시절 나를 괴롭히던 반항아들에 대한 동경 때문일까. 나는 반항아들을 무척이나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부러워했다. 따지고 보면 나를 짓궂게 놀리던 소년들은 '청소년 불가'를 무시하고 어른들의 세계에 먼저 도달한 아이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이돌이 곧 아티스트가 되는 것만도 아니다.
아이돌 코너는 양아치 베리에게 말한다.
"넌 박살 낼 줄만 알지, 무언가를 만들어내진 못하잖아."
코너의 자세와 태도는 나와 너무나도 달랐다. 내가 어른들이 시키는 걸 해내느라 정신없이 내달리던 학생이었다면 코너는 제 것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제 목소리를 내는데 두려워하지 않던 소년이다. 학생과 소년. 이 단어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우울한 학생이고 코너는 꿈꾸는 소년이다. 우울한 소년이라도 됐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정말이지 우울한 학생을 벗어나지 못한 채 학교생활을 끝마쳤다. 선생님이 시키는 것은 빠뜨린 적이 없고 학교에서 지키라는 것은 어겨본 적도 없이.
코너는 나에게 뭐라 했을까. 아마도,
"넌 피할 줄만 알지. 무언가에 뛰어들진 못하잖아."
나는 학생신분을 지킨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내가 진심으로 원하던 것을 회피했다. 그토록 맛이 궁금하던 술 한잔 마셔보지 못했고 남학생들 사이에서 창피해 보이던 순정만화를 학교에서 읽어보지도 못했다. 코너처럼 라피나에게 다가가 러브레터 한 장 전해주지도 못했고 글 쓰는 아이들을 모아 문집 한 권 만들지도 못했다. 결국 나는 학생 때 그럴싸한 연애 한번 못해본 숙맥이자, 유난스럽게 소설 하나 완성하지 못한 머저리 등신이다. 머리 다 커서 뒤늦게나마 내 영화글을 한데 모아 책 한 권 만들어보겠다며 발버둥 치는 중이다. 그래도 한 가지 궤변을 늘어놓자면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자친구 라피나도 단짝 에이먼도 형 브렌든도 그 누구도 없었다.
코너 곁에는 그를 빛내주는 멋진 존재들이 모두 함께 한다. 그중에서도 나에게는 에이먼이 가장 필요했다. 코너는 에이먼을 만나 자신의 가사에 멜로디를 더한다. 코너의 창작물은 에이먼이 있기에 날개를 펼치게 된 것이다. 내게는 에이먼이 없었다. 그러니 날 수 없었다고. 내 글을 일기에 가둘 수밖에 없었다고. 억지 부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중학생이었던 나는 정말 그랬다. 가장 친한 단짝이야 있었지만 우린 같은 꿈을 꾸는 사이가 아니었다. 서로의 꿈을 응원하는 솔로였지 꿈에 시너지를 더해줄 듀엣이 되진 못했다. 코너와 에이먼은 합이 잘 맞는 듀엣이다. 둘의 협업이야말로 내가 꿈꾸던 시너지다.
에이먼이 시너지라면 라피나는 뮤즈다. 모델을 꿈꾸던 라피나는 무엇 하나 적당히 넘긴 적 없는 '드림걸'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피나가 하루 끝에 화장을 지우는 모습은 무척이나 값지다. 온종일 꿈을 위해 내달린 뒤 잠자리에 드는 모습이니 더할 나위 없이 값진 것이다. 코너가 미래파 밴드를 만들 때 라피나의 도움이 없었다면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졌을 것 역시 자명한 일이다. 꿈을 달리던 소녀는 꿈의 출발점에 선 소년에게 준비물을 제대로 쥐어준다. 멋진 뮤직비디오를 위해 거침없이 바다로 뛰어들던 라피나는 대충 넘기려던 소년들에게 말한다. 이 정도 각오는 되어있어야 한다고. 절대 적당히 해서는 안된다고. 우리 작품을 위해서.
꿈에 있어 라피나는 코너보다 성숙한 인물이다. 둘이서 대화를 할 때면 코너는 묻고 라피나는 답한다. 그리고 코너는 준비하고 라피나는 실행한다. 모델이란 꿈을 대하는 태도 역시 뮤지션의 꿈을 갖게 된 코너보다 그 열망이 강하게 표출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건 금이 간 코너의 가족이지만 속 깊은 사연을 들려주는 건 라피나의 가족이기도 하다. 도전을 강행하고 실패와 마주한 라피나의 성숙한 감정 '해피-새드(Happy-Sad)'는 영화 [싱 스트리트]가 전하는 가장 진한 울림일 것이다. 그만큼 라피나는 이번 작품 속최고의 뮤즈로 등장한다.
라피나가 코너에게 '영감'이 되어준 만큼 형 브렌든은 '귀감'이 되어준다. 코너의 음악적 취향과 성취는 브렌든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창작물을 보완해 주는 '색인(Index)' 역시 브렌든 덕이 크다. 코너에게 숙제라고 내어주는 LP와 뮤직비디오는 브렌든이 살아오면서 모아둔 꿈의 기록이기도 하다. 코너는 형의 기록을 따라 걷고 달리게 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도 프랑수아즈 사강도 무라카미 하루키도 틈만 나면 글을 썼다고 하던데 나는 그래본 적이 없다. 틈만 나면 글쓰기. 그것이 나에게는 걷고 달리는 일일 텐데 요즘 나는 걷는 것도 달리는 것도 힘에 겨워 가만히 서있다. 겨우 한발 떼면 뒤에 머문 발에 이끌려 다시 제자리에 붙어있는 일상이다. 여전히 우울한 학생에 남아 굴복의 일기만을 쓰고 또 쓰는.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 에밀리 브론테도 파트리크 쥐스킨트도 글을 쓰기 힘들어 많이 우울했다고 한다. 겨우 영화 [싱 스트리트]를 다 보고 나면 코너만큼 도전하진 못한 나 자신을 질책하다가도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불씨를 살려보려고 사색에 잠긴다. 어쩌면 나의 우울은 코너의 도전에 맞먹을지도 모른다. 힘찬 응원을 전하는 글이 아니라 슬픈 위로가 되는 글을 분명 나는 쓸 수 있다. 그래. 나는 도전하는 소년이 아니다. 우울한 소년이다. 그 우울이 위로가 되는 글을 쓰는 소년이다. Adam Levine의 'Go Now'의 가삿말처럼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