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시작의 역설
'100년 만의 폭설'
2010년 1월 4일, 마침내 첫 출근일이 되었습니다. 첫날이니 만큼 정장을 차려입고, 절대 늦지 않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사람들 머리 위로 사람이 떠다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그런 밀도였습니다. 처음 서울에서 출근하는 저는 매일매일이 이런 줄 알았습니다.
회사에 도착해 보니 이미 9시를 넘었습니다.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런데, 회사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만 출근길 고생을 한 게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날 폭설로 모두의 출근길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론 상대적으로 지각이 아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강남 한 복판에서 보드를 타는 사람의 동영상까지 돌아다녔습니다. 그 정도로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덕분에 입사 첫날의 기억은 강렬하게 남아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돈을 번다는 것은 참으로 벅찬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맥심 커피를 한 잔 타서 들고 뿌듯한 마음을 느끼던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컴퓨터 공학과에 대학원 전공은 네트워크, 첫 회사는 딱 저의 전공에 맞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여기저기 지원을 했는데 최종 합격한 곳이 중견 기업정도 규모의 첫 회사였습니다. 대기업도 지원을 했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반드시 대기업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전공에 좀 더 잘 맞는 곳이 좋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요즘 시대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대기업을 붙들고 있는 것보다 빨리 취업해서 경험을 쌓는 것이 좋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소프트웨어 개발 일을 하면서, 동기들과 어울리고, 선배로부터 일을 배우고, 그렇게 정신없이 신입 시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조금씩 어려워지고 있었고, 사회 초년생이었던 저는 그런 흐름을 읽는 눈이 부족했습니다. 마침내 회사는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풀어보겠습니다.
반지하, 원룸, 형과 함께. 저의 서울 살이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형과 함께 월세를 분담했습니다. 회사와의 거리는 멀었지만, 정착을 위한 노력은 덜 한 셈입니다. 그 해 형은 결혼을 했고, 저 혼자만의 첫 자취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쾌적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독립생활이 주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장판 밑에서 지네가 나오기도 하고, 장마철에는 꼽등이가 문 앞에서 기다렸고, 돈벌레는 수시로 출몰했습니다. 제습기는 필수인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난에 익숙했던 저는 그 모든 것을 청춘의 무지와 에너지로 극복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기존의 삶보다는 나아지고 있었으니까요.
돈을 벌기 시작하니, 왠지 관리가 필요하는 생각이 들어 재테크 관련 책을 한 권 사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는 젊을 때는 주식을 해야 한다고 적혀있었지만, 그 당시에 저는 그 말을 무시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주변 환경과 시대적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주식 투자가 활성화 된 시기도 아니었고, 거래 자체도 힘든 시기였습니다. 지금은 앱에 들어가서 딸깍 하면 거래가 되고, 주식 관련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이니 생각이 없던 사람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저는 부지런히 적금만 넣게 됩니다. 그나마 3년 복리 상품도 나와서 돈을 모으는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수익률 측면에서 따져보면 아쉬움이 있지만, 오랜 기간 돈을 쌓으며 길러진 인내심은 큰 자산이라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빈번하게 사고파는 습관을 들였다면 인내심을 기를 수 있었을까요. 저는 지금도 일정 금액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무조건 모으기만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인내심을 투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에 비하면 낮은 연봉이었지만, 일단 부딪히며 경험을 쌓은 선택은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판단도 당시에는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냥 취업했으니까 당연히 다녀야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습니다.
대학가에 있는 반지하 원룸에서의 시작은 누가 봐도 화려한 시작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시작이 초라하면 앞으로는 올라갈 일이 많습니다. 높은 곳에 있다가 떨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저의 인생 또한 이런저런 고초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의 삶에서 질 좋은 삶까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한 번 사는 인생에서 큰 자산입니다. 가난한 누군가 이 글을 본다면, 이왕 사는 거 많은 경험을 하면 좋은 거라고 마음을 다 잡고, 나아질 미래를 그리며 희망을 품길 바랍니다.
인내심은 투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고민만 하는 것보다 빨리 부딪혀보는 것이 낫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시작이 초라하다고 해서 인생이 초라해지는 것은 아니다.
희망을 품고 인생의 우상향 그래프를 그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