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함께한 청소년 시절

우리 집은 왜 가난했을까?

by 문나잇

'단칸방에서 다른 단칸방으로의 이동'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집들을 생각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부모님은 대체로 낮에 안 계셨고, 형과 저는 어릴 적부터 동네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릴 때 기억을 더듬어보면, 가난이라는 말을 떠올릴 이유도 없었고, 그 단어에 묻어있는 슬픔과 한을 느끼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년 시절 몇 가지 장면은 아직까지 머릿속에 인상 깊게 남아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하루는 학교에서 점심시간을 뷔페식으로 준비했던 적이 있습니다. 반 아이들이 가져온 음식을 앞 테이블에 모아두고, 모두가 공유하여 먹는 시간이었습니다. 뷔페가 뭔지, 저는 당연히 알지 못했고, 집에 가서 이야기하니 어머니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는 게 팍팍했던 어머니는 왜 그런 걸 하느냐고 짜증을 냈고, 저는 동그란 모양의 철제 도시락 통에 부침개 몇 장을 간신히 얻어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되니 부침개는 퉁퉁 불어있어, 영 손이 가지 않는 비주얼이 되어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게 창피하다는 건 알겠더군요. 저는 아무도 볼 수 없을 때를 기다려 재빨리 저의 도시락을 테이블 앞에 던지듯 놓아두었습니다.


이제 모두가 줄을 서서 음식을 담는 시간이 왔고, 저의 앞쪽에 있던 아이가 제 도시락을 보고 욕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줘도 안 먹겠다, 저딴 건 누가 가져온 거냐" 뭐 이런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민망해서 어쩔 줄 몰랐고, 차마 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아이가 맛있는 부침개라며 가져가서 먹는 바람에 망신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저의 상황과는 정 반대로, 어떤 어머니는 한복을 입고 소시지 볶음을 포함한, 아이들이 환장할만한 반찬을 가져와서 선생님으로부터, 또 아이들로부터 엄청난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우리 집은 왜 저렇게 못하지? 까지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망신을 당할 뻔했던 기억이라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유년기를 거쳐 청소년기를 보내는 동안 대체로 이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삶이 팍팍했던 어머니는 돈이 나가야 하는 일은 모두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반응에 학습된 우리 형제는 본능적으로 스스로 살 궁리를 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14평 소형 아파트에 네 식구가 함께 살았던 때가 청소년 시절까지의 가장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화장실이 실내에 있는 집에 살아본 최초의 경험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 마저도 IMF가 터지면서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대학생활 편에서 더 이어가겠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집이 가난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부모님의 교육 과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산골에서 태어난 부모님은 교육보다는 집안의 생계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의지가 있었다면 교육을 잘 받을 수 있었겠지만, 공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반대로, 어머니는 공부에 관심이 있었으나 남존여비 사상이 만연했던 시절이라 공부를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공부를 하지 않아도 돈을 버는 감각이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의 교육 과정에서 세상의 이치와 원리를 학습합니다. 부모님 역시, 적어도 고등교육까지 받았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더 밝아졌으리라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교육열이 뜨거운 시대가 아니었기에 제 부모님만의 특징은 아닙니다. 따라서, 교육 수준이 가난의 절대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시대와 맞지 않는 성향입니다.


1980년대만 해도 대한민국은 고속 성장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예금 금리를 검색해 보면 10% 이상이라고 나옵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치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교육을 잘 받지 못했더라도, 회사 한 군데 들어가서 월급 받아 적금, 예금만 넣어도 꽤 많은 부를 늘릴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사람도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취업이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성향은 꾸준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단기간에 큰돈을 모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고, 귀가 얇아서 사기 비슷한 일을 당한 적도 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성미에 맞지 않으면 화를 내고 때려치우기 일쑤였으며, 주머니에 돈이 있어도 모아두지 못하고 탕진하는 성향이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한 때 강원도 어느 지역에서 사장 지위를 누린 적도 있었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옛날 드라마에 등장하는 꼬장꼬장한 K-장남, 그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는 결혼 전에 서울에서 회사를 다녔으나, 결혼 후에는 일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주로 육아를 했고, 이후에는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식당 같은 곳에서 일을 했습니다. 회사가 드문 강원도 소도시에서, 당시에 유부녀가 일 할 수 있는 직장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꾸준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한 여성의 벌이로 네 식구가 살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런 부모님의 성향과 상황은 당시에 부를 축적하기에 불리했다고 보입니다. 요즘 시대에도 유리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회사 한 군데에서 꾸준히 일만 했어도 강원도에 아파트 한 채는 충분히 마련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부분은, 가난했음에도 당시에 왜 빈부의 격차를 실감하지 못했는가? 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다들 형편이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강원도라는 지역 특성도 포함됩니다.


유년기 시절 살던 동네는 골목길이 하나 길게 나있고, 골목길을 따라 양 옆으로 양옥 주택이 늘어서있었습니다. 물론, 집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로 구조와 형태는 비슷했습니다. 또래 아아들은 골목 위 공터에 수시로 모여 많은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고, 가끔은 어른들도 나와서 같이 어울려 놀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실제 장롱 속의 자산은 차이가 있었겠지만, 사는 모습은 대체로 비슷했기에 차이점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청소년 시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야기의 주제는 주로 농구나 축구, 게임이나 공부에 관한 것이었지, 자산과 관련한 이야기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하루 일과가 비슷하다 보니 차이를 느끼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친척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형제, 그러니까 저의 삼촌과 고모들 중에도 특출 나게 큰 자산을 형성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가진 사람들이 유세를 떨지 않았습니다.


잘 사는지 못 사는지, 크게 의식할 시기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부유한 집의 자식은 티가 나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친구는 그냥 '몇 반의 아무개' 일 뿐이었습니다. 그 친구들도 자기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같이 어울려 놀고, 싸우기도 하고, 선생님에게 혼나기까지 똑같았습니다. 그 친구도, 친구의 부모님도, 유세를 떠는 모습이나 정황은 제 기억에 없습니다. 교권이 추락하고, 학부모가 온갖 유세를 떠는 지금과 비교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 집이 가난했던 이유는, 부모님(아버지)의 성향과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빈부의 격차를 크게 느끼지 못한 것은, 비슷비슷한 주변 환경과 사회적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어떤 사실을 도출해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과거에는 꾸준함만으로 부를 늘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사회는 점점 양극화되고 있다.


일요일 연재
이전 01화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