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사기

인생도 주가처럼 조정을 받는다

by 문나잇

8년 만난 연인과의 이별


제주도에서 꽤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위기가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그때, 제 인생에 서서히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당시 연인과는 대학 시절부터 꽤 오래 만난 사이에 결혼도 생각했기에 부모님께 인사까지 마친 상태였습니다. 긴 시간을 함께 한 만큼 장거리 연애가 문제가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서른 중반이 된 나이에 환승 이별을 당하니, 마치 벼랑 끝에서 떠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저의 좋은 시절만 쏙 빼먹고 버리는 것 같아 야속한 생각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사실, 제주도에서 서울로 돌아가게 된 것도 회사의 방향성 측면도 있지만, 어떻게든 다시 그녀를 잡아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


서울 살이를 하려고 방을 알아보던 때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비가 우울한 리듬을 타고 내리던 날, 좁은 골목길의 주택가 사이를 담배 냄새가 밴 중개사의 차를 타고 지나갔습니다. 중개사가 보여준 작고 퀴퀴하던 방, 그 방이 마치 저의 인생 같아서 그날은 참으로 우울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별생각 없이 살았는데, 막상 서울 살이를 시작하려니 저의 경제적 수준이 뼈를 때리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 결국 회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신축 소형 오피스텔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제주도에 3년 정도 사는 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느꼈습니다. 일단, 지인들과의 연락이 쉽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는 쉽게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도 이제는 만나기가 어려웠습니다. 나이가 들면 만남이 어려운 것이 당연한 것도 맞는데, 막 이별을 하고 외로움에 휩싸여있던 저는 아직 그 사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모습에서 탈바꿈하기 위해 운동도 하고, 스타일에 신경도 쓰고, 소개팅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외로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30대 중반의 혼자인 삶은 참으로 단조롭고 외로운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약해진 틈을 노리고 연락을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과거에 알바를 했던 고깃집 사장이었습니다. 알바 시절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아 누나라고 불렀고, 술도 함께 자주 마시고, 같이 놀러 다니기도 했던, 나름 돈독한 사이였기에 돈 좀 빌려달라는 말에 별로 의심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빌려주기 시작한 돈이 사기가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빌려준 돈은 소액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 근처로 직접 찾아와 사업을 하고 있다며, 돈을 빌려주면 월 이자 2%를 준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저 말고도 계약한 사람들의 계약서를 보여주면서. 사실, 저는 이자에 혹해 돈을 빌려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나가 하도 급한 상황이라며 사정을 해서 조금씩 보낸 돈이 계속 쌓였던 것이었습니다. 빌려준 돈에 이자를 준다고 했지만, 쉽게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계속 닦달을 해야 며칠 지나서 간신히 들어왔는데 그것도 최대 2회 받은 것이 전부입니다. 저는 그냥 원금을 돌려받기 원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더니, 나중에는 일이 잘 되지 않았다며 차용증만 쓰고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 이후로는 연락도 받지 않았고, 수소문해 보니 모든 걸 정리하고 잠적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수 천만 원의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면역이 약해지면 감기에 걸리듯이, 인간은 방황할 때 취약해지고, 멍하게 있다가 당하게 됩니다. 절대로 돈을 빌려주지 말라는 교훈을 몸소 체험한 것입니다.


석촌 호수 근처의 원룸에 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호수 산책을 하다가 같은 회사에 다니는 대학교 후배와 마주쳤는데 저와는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이 한눈에 느껴졌습니다. 잘 갖춰 입은 옷, 좋은 차의 키, 그 옆에는 어리고 아름다운 여성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저는 옷도 삶도 후줄근 그 자체였습니다. 그 후배의 삶도 처음에는 힘들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상대적 박탈감은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저는 제 인생에 대해서 심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나이는 꽤 먹었는데, 아직도 반전세 원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연애도 못하고 있는 저의 현실에 우울함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서른 중반의 나이는 그래도 일어설 수 있는 나이였나 봅니다. 다음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게 됩니다.


다니던 회사가 망해서 저점을 찍은 이후, 이직으로 우상향을 그리던 저의 인생 그래프는 이렇게 이별과 사기로 조정을 받습니다. 삶이 좀 나아지나 싶었는데 가난의 그림자가 여전히 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자산 측면에서 보면 사기로 인해 여유분으로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날리게 됩니다. 모든 자산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큰 타격을 받은 것입니다.


인생에서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온다.
만약, 자신이 취약한 상태라면 경계를 해야 한다.
지인 간 돈거래는 절대로 하지 말라.
돈을 빌린 사람이 처한 상황이 그 사람을 갚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다.
결국, 돈도 사람도 잃게 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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