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과 행복, 그리고 합병

행운은 어떻게 찾아오는가

by 문나잇

'064-xxx-xxxx'


처음 보는 생소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지역번호 064는 제주도를 의미합니다. 이 전화 한 통이 이직의 시작이었습니다.


급여가 계속 밀리고 있던 어느 날 온 전화였습니다. 한차례 고배를 마신 후 인재풀에 등록을 해두었는데 제 이력서를 본 제주도에 위치한 조직에서 연락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를 하더니 제주도에 올 수 있냐고 물어봐서 처음엔 좀 당황했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걱정보다는 설렘의 감정이 더 컸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는 성향도 있거니와 그 당시는 혈기 왕성한 나이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도전을 해보기로 했고, 정규 채용 과정을 거쳐 마침내 입사가 결정되었습니다. 마지막 면접 이후로 연락이 오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합격 소식은 기쁨의 감정을 배로 고조시켰습니다.


그렇게 제주도 생활이 급작스럽게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빅픽쳐라는 책을 읽었는데 주인공이 살인을 저지르고 다른 도시로 도망가서 원래 꿈이었던 포토그래퍼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살인을 저지른 건 당연히 아니지만,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그리는 그 해방감만큼은 공감이 되었습니다. 월급이 나오지 않는 경제적 불안을 벗어날 수 있었고, 부담이 되는 본가와의 거리가 멀어진다는 사실에서도 해방감이 느껴졌습니다. 대학원 졸업 때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며 좋지 않은 경험이 쌓인 것이 해방감의 근원이었습니다.


제주도의 생활은 바쁘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조용하면서 착하고 재미있었고 직원들 간의 유대가 깊었습니다. 이때 만난 인연을 아직까지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주도 근무자를 위한 지원도 꽤 있어서 경제적 부담을 많이 덜 수 있었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제대로 자산을 모아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쁜 일도 한 번에 일어나지만, 좋은 일 역시 그런 것일까요. 마침 전 회사의 법적 문제도 잘 해결되어 국가로부터 밀린 급여 및 퇴직금 일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경력이나 경제력 모든 측면에서 질적, 양적 확장이 일어나는 시기였습니다.


개발자로서 성장의 욕구 또한 최고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일도 열심히 하면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스터디도 하고, 개발자 콘퍼런스에도 참여하며 종횡무진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입사하고 맡았던 프로젝트가 연달아 우수 평가를 받아 포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마침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는 분야도 미국을 기점으로 점점 크게 확장하는 시기가 이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대내외 환경 모두 개발자인 저에게 유리한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정말 큰 고민 없이 개발에 몰두하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바닷가 근처 카페로 가서 코딩하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정말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생활환경이 나아지고 경제력이 좋아지니 그 효과는 가족에게도 번지게 됩니다. 아버지가 평생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금전적 지원을 했고, 명절 때는 친지들이 모이는 자리에 제주도 특산물을 올리는 등의 부수적인 지원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알게 모르게 금전적 지원을 하게 됩니다. 가족 중 한 명이 잘 되면, 마치 복지제도가 생기는 것처럼 가족들에게도 영향이 간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안에서 큰 인물을 한 명이라도 내려고 그렇게 애쓰나 봅니다.


그렇게 제주도 생활을 이어가던 중에 갑자기 합병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합병의 모양새가 제가 다니던 회사가 인수되는 분위기라 초반에 약간의 신경전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잘 풀렸습니다. 회사가 어려워져 구조조정이나 매각이 되는 형태가 아니라 시너지를 내는 방향으로의 합병이라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구성원들이 사적으로 좋아지는 부분이 있었다면, 합병하는 회사와 처우의 수준이 맞춰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합병으로 인해 연봉이 상당폭 상승하게 됩니다. 아쉬운 점은 제주도의 확장이 멈추고 이제는 위축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제주도 근무자들의 지원 정책도 사라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저도 약 3년간의 제주도 생활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풀어보겠습니다.


급여가 나오지 않는 환경에서도 목표로 했던 회사에 집착하고 끝내 입사하게 된 것은 저의 노력이 상당한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여러 회사에서 채용이 활발했던 분위기, 해당 부서에 제 이력서가 노출된 것은 시대적 환경과 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합병은 어떨까요. 저는 합병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합병으로 인한 수혜는 받았으니, 이는 운이라고 밖에 볼 수 없겠습니다. 다만, 연봉 인상폭은 실력대비 저평가 되었는지 여부가 반영되므로, 평가를 잘 받기 위해 그동안 제가 노력한 부분은 일부 반영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운으로 좋은 기회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준비된 자에게는 같은 운이 따를 때 더 큰 보상이 따를 수 있다는 사실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노력한다고 모두가 성공하지는 않지만,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노력을 했다는 말과 비슷한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운으로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준비된 자에게는 같은 운이 따를 때 더 큰 보상이 따를 수 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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