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
멍하니 영화를 보다가 홀린 듯 대사를 따라 중얼거린다.
다이죠부 だいじょうぶ
일본어로 "It's ok.", "No problem.", "괜찮아요."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표현이다. 한자로는 어떻게 쓰는 거였더라. 기초 일본어회화 교재에 무수히 등장했을 말인데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 다시 보면 된다.
大丈夫
으흠, 그렇.... 어? 이거였나? 왜? 이거 그거잖아. 사내대장부의 그 '대장부'. 한동안 단어를 노려보다가 국어사전을 열어 '대장부'를 찾았다. 설명된 단어의 뜻은 이렇다.
건장하고 씩씩한 사내
다들 아는 것처럼 '상남자'라는 말의 유의어쯤 된다. 내가 몰랐던 숨은 뜻이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저 이것 뿐.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이 단어를 어쩌다 괜찮다는 의미로 관용하게 된 것인가. 곰곰히 생각하는데 문득, 우뇌가 내놓은(좌뇌는 멍때리고 있다) 추론에 홀로 감탄하며 멋대로 납득해버린다.
그래, 수컷들에게 주어진 굴레가 긴 세월 이어져 내려온 끝에 엄한 단어에 생뚱맞은 의미가 붙어버린 것인지도 몰라. 모름지기 제대로 된 남자라면 찌질하면 안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괜찮아야 한다. 죽을 날을 받아놔도 엄지를 척 세우고 씨익 웃으며 "I'm ok."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겠지. 고로 성립된 '대장부=괜찮아'라는 등식.
이 얼마나 마초적이며 꼰대스러운 전근대적 논리인가, 싶다가도 이 억측이 높은 확률로 진실의 언저리에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나도 꼴에 남자라고 살아온 경험이 그랬던 것이다. 아직도 걸핏하면 '사무라이 정신' 운운하는 물 건너 그 땅이야 이 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굳이 라떼를 들먹이지 않고 현재를 봐도 충분히 그렇다. '양성평등'과 '젠더리스'가 보편적인 이 시대에도 그것은 여전히 세상이 남성에게 요구하는 남성성의 표준이며 의무이자 책임같은 것이니까.
하여, 오늘 밤도 나는 나의 스물세번째 염색체에 관해 잠시 고찰하다가 먼저 잠이든 아내와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다이죠부, 다이죠부, 바보처럼 주문을 외운다.
P.S
응, 걱정마. 나 안 괜찮지않지않지않지않아.
20250908
食蟲
츠레는 앞으로도 이 우주감기와 계속 알고 지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밤도 새벽이 없는 밤은 없다.
비록 새벽하늘이 흐릴지라도 밤보다는 훨씬 밝은 것이니까.
- 영화《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