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아테네 시절. 소크라테스는 단어의 의미를 집요하게도 물어가며 아테네 시민들을 괴롭혔다. 사랑이 뭐냐, 정의가 뭐냐, 행복이 뭐냐. 그런 질문을 통해 대화를 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는 높이 사지만, 그의 대화를 정해진 답으로 만들려 했던 플라톤에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
사랑, 정의, 행복 그런 것들은 그저 언어의 논리로 규정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각 개념에는 선험적으로 의미가 정해져 있고 사람들이 그 의미를 적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은 구시대적 도그마일 뿐이다. 의미는 반드시 구체적인 현실에 달라붙어 발생한다. 그런데 인문학은 언어 내적 논의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학문이다. 그것이 인문학이 지닌 본질적인 한계다. 인문학은 원래부터 결론에 도달할 수 없도록 태어났다.
예를 들어 보자. 요즘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중요해졌다. 아마도 AI와 로봇, 복제인간과 사이보그 등에 대한 우려 때문일 것이다. 지금과 같은 현실이 도래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정의를 물을 필요도 없었으며 그 의미를 규정하기 위한 방향성도 달랐을 것이다. 천 년 전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현대인과는 전혀 다른 맥락과 방향에서 논의가 이루어질 게 빤하다.
그런 이유로 논쟁을 할 때 "만약에"라는 가상의 상황을 가정하는 것은 무의미한 시도다. 그 만약이란 상황은, 정말로 나의 현실을 뛰어넘는 완전히 바깥 세상의 일이 아니라, 실은 내가 가진 언어적 정보의 풀(pool) 안에서 짜맞춰진 조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은 결코 내가 가진 정보값을 넘어설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플라톤이 아무리 정교한 논리로 사랑이니 행복이니를 논해 봤자 플라톤 개인이 가진 언어적 정보 풀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 그의 결론이 보편적 정의(definition)가 될 수 있겠는가. 부처의 눈엔 부처가, 돼지의 눈엔 돼지가 보일 뿐.
(위 글은 제 책 [문해력을 문해하다]의 일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