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 관계와 소실점
차트 분석은 사후 해석이지 않을까. 기술적 분석을 의심하는 이들은 많이들 그렇게 생각한다. 나 또한 상당 부분 동의한다. 책에서 해설을 통해 차트를 분석할 때는 너무 자명해 보여 이걸 대체 어떻게 못할 수가 있지 싶다가도, 정작 실전에서 차트를 보면 이게 책에서 말하던 그게 맞나 머리가 아프다. 책 읽을 때의 명쾌함은 어디로 가고 없고, 차트 앞에 서면 온통 물음표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러다 엉뚱한 종목을 골라 매수하고, 다음 날 자책한다.
정말 이상하고 신기하다. 어제 봤을 때는 오를 것 같지 않던 차트가, 오늘 오르고 나서 보면 어떻게 어제는 눈치채지 못할 수 있었지 싶을 때가 많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매일 십수 차례씩 본다. 오르고 나서 보면 너무나 명석해 보이는 차트가, 왜 하루 전날에는 그리 보이지 않았을까. 오를 것 같던 차트도 다음 날 막상 하락하고 나서 보면, 너무나 자명하게 조정이나 하락할 태세로 보인다. 이런 경험을 만 4년 동안 하고 있다. 차트 분석이 사후적인 해석이라는 비판은 충분히 타당하다고 인정한다.
과학 철학에서는 인과 관계라는 것이 인간 능력의 한계에 따른 본질적인 오해일 수 있다는 입장을 제기한다. 습관에 따른 해석 및 결론을 믿는 것 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기에 현실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일부 학자들의 문제 의식은, 원인이 결과를 만드는 게 아니라 반대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은 실은 과학 분야에서 가장 늦게 제기되었고, 오히려 여타 분야에서는 인과론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가 어느 정도 인정되는 추세로 마무리되고 있다. 철학에서는 니체가 그랬고, 그 후 역사학에서는 크로체와 콜링우드가 그런 비판을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가령, 과거에 A라는 사건이 있었고, 현재 B라는 사건이 일어났다면, 보통은 A 때문에 B가 일어났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니체는 그러한 관점은 '원근법적 도착'인지 모른다고 비판했다. 오히려 현재의 B가 있었기 때문에 과거 수많은 사건 중에서 하필이면 A가 눈에 띤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근대 회화에서 발달한 원근법은 오랫동안 그것이 인간의 시각을 정확하게 재현했고, 따라서 외부 세계를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법이라고 오해 받아왔다. 완벽한 원근법에 따라 그려진 그림을 보면, 저 멀리 소실점과 화가 눈 사이의 풍경이 기하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관객은 그 정밀함과 체계성에 속는다. 하지만 소실점 따위는 화가가 한 걸음만 옆으로 옮겨도 바뀌어 버리는 허약하고 일시적인 기준일 뿐이다. 소실점이 풍경을 펼치는 게 아니라, 화가의 눈이 풍경을 비롯한 소실점까지 창출한다. 우리가 과거를 보는 시선도 그와 같다는 비유에서 니체는 '원근법적 도착'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크로체와 콜링우드도, 과거의 수많은 인물과 사건 중에서 특정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역사를 구성하는 것부터가 이미 역사가의 주관적 산물이며, 그 인물과 사건을 어떻게 서술하는지는 현재 역사가가 지닌 역사관이나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일갈했다. 역사적 서술에는 역사가가 살고 있는 시대적 배경과 정치적 상황, 그 시대의 관습과 전통, 당대 사회를 지배하는 주요 이데올로기의 영향이 가득하다. 그뿐 아니라 역사가 개인의 취향, 관심사, 정치적 성향, 세계관이라는 필터에 의해 성형된다. 더 나아가서는 현 시대의 이익을 위해 과거사를 의도적으로 재해석하는 사례도 많다.
동양의 포커라 불리는 섯다를 예로 들어보자. 첫 번째 패가 3월 벚꽃 광이라 치자. 그때까지 이 카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두 번째 패를 받고 나서야 첫 카드가 의미를 띠게 된다. 두 번째 패가 만약 9월 국화거나 10월 단풍이라면 2끗이거나 3끗으로 위기일발이다. 만약 두 번째 패가 같은 3월 벚꽃이라면 3땡이고, 운이 좋아 8월 광이라면 3-8 광땡으로 무조건 승리다. 이 경우는 확실히 두 번째 패가 첫 번째 패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미셸 푸코는 현재의 작가가 과거의 작가를 표절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작가가 현재 작가를 표절한다는 놀라운 말을 한 적 있다. 이도 역시 위와 같은 발상이다. 만약 내가 과거 학자의 책을 읽고 그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아 비슷한 논조의 글을 쓴다면, 일반적으로는 내가 그를 모방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푸코는 반대로 생각했다. 내가 과거 학자의 책을 읽고 지금과 같은 글을 쓴 건, 내가 그 학자의 주장을 지금과 같이 읽고 해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과거의 학자가 죽고 난 지금 그의 진의를 물어볼 수 없으며 알 길이 없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어떻게' 읽는지는 철저히 내 주관의 영역이다. 이로써 주종관계가 역전된다. 기존에는 과거 선인이 주, 내가 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주, 과거 사람이 종이다. 나는 선인들의 글을 내 마음대로 읽고 해석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프로이트가 이미 그런 분석을 내놓았다. 내담자 A는 5세 때 노인의 가벼운 신체 접촉을 경험한 적이 있다. 당시 A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사춘기를 겪고 성인이 된 A는 그때 그 노인의 터치가 성추행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것이 진실일까. 말년에 프로이트는 반대로 해석한다. 노인이 정말 성추행을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고 혹시 정말 그런 의도였다 하더라도 5세였던 A가 그 행동의 의미를 파악했을 리는 없다. 그러므로 당시 A는 진짜로 그 행동의 의미를 몰랐다는 것. 성인이 된 후에 사후적으로 그때의 경험을 성추행이었다고 규정한다는 게 프로이트의 분석이다.
최근 이와이 슌지의 영화 <러브 레터>를 다시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중학생이었던 여자 후지이 이츠키는 정말로 남자 후지이 이츠키를 좋아했던 게 맞을까. 어쩌면, 그때는 정말 성가시고 이상한 남자애라고만 생각했던 건 아닐까.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후에 와타나베 히로코와 편지를 주고받고 또 그의 죽음을 알게 된 지금 뒤돌아보니 어쩌면 그게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제 와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닐까.
슬라보예 지젝도 비슷한 사례를 제시한 적 있다. 윌리엄 텔의 SF 소설 <모르니엘 마타웨이의 발견>이 그 예시이다. 소설 내용은 다음과 같다. 25세기의 미술사가가 20세기에는 저평가됐던 천재 화가를 찾아가 그의 삶을 연구하고자 20세기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정작 그 화가를 만나니 천재성은 1도 없고 그저 허세 가득한 사기꾼에 가까운 캐릭터였다. 우여곡절 끝에 그 화가는 미술사가가 타고 온 타임머신을 타고 25세기로 가버린다. 20세기에 갇혀 버린 미술사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 화가의 대작들을 그리게 된다. 25세기에 자신이 본 천재 화가의 그림이 실은 20세기로 건너온 자신이 그린 작품이었던 것이다. 지젝이 여기서 지적하는 것도 바로 과거의 원인이란 현재에 의해 소급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들도 실은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것들이 많다. 근대 회화의 소실점처럼 말이다. 원근법이라는 기법에 의해 소실점이 만들어졌음에도, 우리는 마치 소실점이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착각한다. 마찬가지로 전통이라는 것들 중에는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산물임에도 정책적, 사회적, 역사적 왜곡에 의해서 마치 그것이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것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많다. 대표적으로는 설날과 추석을 가장 큰 명절로 생각하는 풍습이 그러하다.
다시 주식으로 돌아오자. 차트 분석에서도 분명 오늘의 캔들을 전제로 어제의 캔들을 해석한다. 오늘의 캔들이 없다면 어제까지의 캔들은 명확한 의미가 결정된 것이 아닌 셈이다. 또 오늘의 캔들은 내일의 캔들에 의해 의미가 규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신포도 이론과 다를 바 없는 차트 분석을 이제 그만 관둬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차트 분석이 유의미한 매매 기법이라고 확신한다.
통계학에서는 인과 관계와 상관 관계를 분명히 구분한다. 그런데 인과 관계만 유의미하고 상관 관계만으로는 아무런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특히 현대와 같이 데이터의 사이즈가 방대해진 빅 데이터 시대에는 오히려 인과 관계 따위 안중에도 없다.
대표적인 예로 샛별 배송으로 유명한 마켓 컬리를 생각해 보자. 다음 날 새벽에 전복을 고객의 집으로 배송하려면, 마켓 컬리 입장에서는 고객이 주문하기도 전에 미리 충분한 양의 전복을 공수해 놔야 한다. 그런데 주문 전에 너무 많은 양의 전복을 사두면 남는 전복은 폐기처분해야 한다. 반대로 주문보다 적은 양의 전복을 준비했다가는 품절 사태가 벌어져 고객들이 떠나버릴 우려가 있다.
다행히 그들이 적정량을 준비할 수 있는 건 빅 데이터 분석 덕분이다. 그들도 이유는 모른다. 왜 어제는 저만큼의 전복 주문이 들어왔는데, 오늘은 왜 이만큼의 전복 주문이 들어오는지. 그렇지만 데이터 분석 결과는 얼추 그만큼의 양이 도출된다. 추정치에 따라 전복을 미리 주문해 두면, 거의 매일 1% 이내의 오차로 전복이 다 팔린다.
물론 투자자 개인의 차트 분석을 감히 빅 데이터에 비빌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화살표의 방향이 어느 쪽이든 상관관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차트를 봐야 하고, 또 하나의 차트에서도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몇몇 변수를 조건식으로 만들어 성과검증을 해보곤 한다. 그럼으로써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일 수 있는 변수를 찾으려 노력한다.
그러므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여전히 100% 성공 따윈 있을 수 없다. 다만 조금 더 높은 확률의 기법이 존재할 뿐이다.
Q. 인과 관계는 무시할 수 없다. 현재는 과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vs 인과 관계는 결정론이 만든 이론일 뿐이다. 오히려 과거가 현재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