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라디오 손에 들고 잠든 썰
이들 셋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아리송하다면 추가 힌트.
부서지는 햇살은 나만 비추나, 나 이렇게 행복해도 돼?
저 하늘의 햇살은 너만 비추나, 너 그렇게 눈부셔도 돼?
리듬이란 접시 위에다가 달콤한 피아노를 끼얹지.
It’s 11:11. 오늘이 한 칸이 채 안 남은 그런 시간, 우리 소원을 빌며 웃던 그 시간, 별 게 다 널 떠오르게 하지.
네 맘 끝자락처럼 차가운 바람, 창을 열면 온통 네가 불어와.
관통하는 하나의 감성이 느껴지시는지! 세 곡 모두 한 사람이 노랫말을 썼다. 바로 김.이.나.
작사가 김이나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한 막간 소개 타임. 브라운 아이드 걸스 ‘Love’, ‘Abracadabra’와 아이유 ‘잔소리’, ‘좋은 날’ 작사를 맡아 대중에게 알려졌고 최근에는 <하트시그널> 패널로 출연해 신조어 제조기로 눈도장을 쾅 찍은 바 있다. 그녀의 이름은 못 들어봤어도 그녀의 노랫말을 못 들어본 사람은 없을 만큼, 김이나의 펜을 스친 히트곡이 많다. 드라마 <궁> OST였던 제이 ‘Perhaps Love(사랑인가요)’, 예능 <우리 결혼했어요>의 아담커플 가인&조권 ‘우리 사랑하게 됐어요’도 김이나의 작품이다. 2012년부터 3년 연속 가온차트 ‘올해의 작사가상’을 받으며 한때 작사가 저작권료 수입 1위에도 올랐던 그분. 오늘은 작사가 김이나가 아닌 ‘밤디(<김이나의 밤편지> DJ 애칭)’ 김이나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밤 12시 5분, <하트시그널> 오영주의 노래 ‘Sleeping Beauty’가 흘러나온다. 이어서 들려오는 낭창낭창한 목소리. 쿨하지만 쿨하지만은 않은 작사가 김이나의 생각들이 전파를 타고 전해진다. 아이유를 떠올리게 하는 밤편지는, 사실 김이나가 작사하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처음엔 ‘하루 끝’(김이나가 쓰고 아이유가 부르는 명곡)도 라디오 이름으로 고려되었다고 한다. 결국은 아이유에게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 아주 훌륭한 운명이 택한 이름이라고 방송에서도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시그널 뮤직, 프로그램 제목, 멘트까지 <김이나의 밤편지>는 구석구석 김이나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것들로 꾸며져 있다.
곳곳이 김이나라는 사람의 생으로 칠해져 있지만 결국 <김이나의 밤편지>가 어떤 색이냐는 질문에는 쉬이 답하기가 어렵다. 아직은 색깔이 없다. 그래도 괜찮을까? 첫 방송부터 매일 <김이나의 밤편지>를 들으며 김이나가 어떤 사람이고, 이 도화지에 어떤 색깔을 칠해나갈 것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던 순간들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해보자면 너무 옅다. 짙게 그려진다면 ‘색종이 파란색’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우리 밤디.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는 걸 크러쉬 언니, 어디 있어? 여기. 기대했던 목요일 코너 <극한 연애>는 기대 이상이었다. 좌회전, 우회전 없이 직진이었다. 유난하지 않지만 개성은 있었다. 아프면 충분히 아파하고, 처한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 치유이자 위로가 된 2019년이다. 이 지금(밤디가 극찬한 아이유 노래, 기승전 아이유.)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밤디는 말한다. “사이다처럼 정신 번쩍 드시라는 의미에서 ‘어느 멋진 날’ 들려드릴게요.” 조곤조곤 팩폭(팩트 폭력)을 가하는 밤디의 멘트에서 역설적이게도 따뜻함을 느꼈다. 작사가 김이나에게 팬들이 바랐던 연애 상담은 아마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디는 너무 착하게 한 것 같다며 걱정 섞인 말을 늘어놓았다. 당장은 아프더라도 주사를 놓아주겠다는 일념으로 극약처방을 해주었어야 했는데 더 노력하겠다며. 네? 정신 안 차리셔도 돼요. 충분했어요. 앞으로 밤디와 불나방(<김이나의 밤편지> 청취자 애칭) 사이가 편안해진다면 돈독해진다면 자연히 ‘정도’의 문제는 해결되리라 믿는다. 다가올 목요일 코너에서는 정신과 의사나 소설가 등 슈퍼 상담 전문가를 모시고 함께 연애 상담을 진행할 계획도 있다고 하니,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촌철살인을 즐기고 연애에 통달한 걸 크러쉬 옆집 언니, 내가 찾은 첫 번째 밤디 색깔이다.
데이브레이크 이원석과 밤디의 취향으로 불나방에게 특정 노래를 ‘영업’하는 월요일 코너다. 작사가는 어떤 노래를 들을까 참으로 궁금했다. 수많은 노래를 들었을 그녀가 내게 노래를 좀 영업해주었으면 했는데 그 꿈이 현실이 되었다. 유명한 노래일 때도 있고 숨겨진 노래일 때도 있고 또 나만 알 거라 생각했던 노래일 때도 있고. 이원석이나 밤디와 취향이 비슷하다면 더 만족스러울 코너다.
편안해서인지 밤디의 현실 모습을 얼핏 느낄 수 있었던 시간도 <영업합니다>였다. 특별하게 준비한 화요일 코너 <DJ 레드카펫>보다 자연스러웠다. 유희열, 윤상과 함께 했던 지난 두 번의 방송에서 밤디는 하늘 같은 DJ 선배님들 앞에 살짝은 주눅 든 새내기 같았다. 붕 뜬 목소리 톤에 대비되어 선배님들은 차분하고 라디오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톤을 선보였다. 배를 잡고 웃게 만든 유희열의 매력과, 마음 편히 하루를 마무리하게 하는 윤상의 매력 때문에 밤디의 매력은 가볍게 묻혔다. 당연히 2일 차, 9일 차 DJ이기에 비교가 무의미하겠지만 아쉬움은 있었다. ‘유희열이 DJ를 다시 하면 좋겠어.’라는 바람은 애초에 청취자가 떠올리지 않도록 해주는 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유희열, 윤상이 섭외 가능한데 손 놓고 있으라는 뜻은 아니다. DJ 선배님들과 함께인 순간에도 두드러져 보일 수 있는 밤디만의 매력이 무엇인지 미리 고민했어야 했다.
아무튼 편안했기에 활개를 펼 수 있었던 <영업합니다>의 밤디는 매력적이었다. 밤디의 매력은 푸르른 색종이의 파란색처럼 확실하고 꼿꼿한 바람직함에서 나오기에, 앞으로는 자신감만큼은 꽉꽉 채워 충전하고 자정을 맞았으면 한다. 당당함과 당참이 밤디 색깔을 더 짙게 만들어줄 것이다.
언젠가 방송인 김이나가 한 말을 듣고 힐링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뼈 때리는 조언에 무자비하게 맞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이 사람이 나를 걱정하고 있구나, 하는 따스함을 느꼈다. 쓰디쓴 극약처방으로 이후 난 이내 툭툭 털고 일어설 수 있었다. 이젠 매일 자정 95.9 MHz에 라디오를 튜닝하며 극약처방을 기다리는 나 같은 불나방을 위해. 그 누구도 아닌 밤디만의 색깔로 불나방의 자정을 물들여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