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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개연성 Sep 20. 2020

출구 없는 방

<브리짓 존스의 일기> 르네 젤위거


대학교 일 학년 때 동기들과 함께 맞춘 첫 과잠에는 오른쪽과 왼쪽 손목 부근에 원하는 문구를 새길 수 있었다. 나는 오른쪽에는 내 이름을 영문으로, 왼쪽에는 NO EXIT이라고 새겼다. 친구들이 NO EXIT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내 매력에 출구가 없다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당돌하고 뻔뻔했다. (물론 상당히 귀엽기도 하다.) 사실 과잠이라는 것 자체가 치기 어림을 상징하는 아이템이 아닐까 싶은데, 한 해 동안은 버스고 지하철에서고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고 2학년에는 시험 기간 아니면 입지 않았고 3학년이 되면서 옷장에 처박아두고 부끄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과잠에 'NO EXIT'이라고 새길만큼 출구 없는 매력의 소유자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믿었다. 나의 대학 생활은 상당 부분 나의 매력을 확인하고자 했던 노력과 그에 관한 잊지 못할 에피소드로 점철되어 있다. 물론 엄청난 흑역사지만 돌이켜보면 생각보다 성공적이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내가 그들을 진심으로 좋아했기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때때로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람이 나를 정말 많이 좋아해 주었다. 사실 전자보다 후자가 더 기억에 많이 남는다. 당시에 정말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대체 왜 나를 이렇게 사랑스럽게 보는 거지? 눈에 뭐가 씌었나? 미친 거 아닌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고등학교 때부터 십 년 넘게 꾸준했던 스스로의 매력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음을 느꼈다. 다르게 말하면 더 이상 팜므파탈이 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오랫동안 되고 싶어 했는데! 물론 나는 절대 팜므파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그런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팜므파탈이 주는 이미지, 출구 없는 매력이라는 말이 더 이상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No Exit, Jean Paul Sartre


사르트르의 희곡 <출구 없는 방>에서는 세 명의 등장인물이 차례로 방에 들어오는데, 이 세 사람은 서로가 주변에 있는 타인을 견디지 못한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유명한 대사도 여기서 나왔다.



그들도 처음에는 입을 다물고 서로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자고 약속한다. 그런데 에스텔이 거울을 찾기 시작하고, 이네스가 "내가 거울이 되어 줄까요?"라고 말하며 에스텔에게 추근대다 곧 세 명의 싸움으로 번진다. 인간은 거울, 즉 나를 인식할 대상 없이는 스스로의 존재를 견디지 못한다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생각이 반영된 전개다. 셋 모두가 서로를 증오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방을 나가고 싶어 하지만 정작 방문이 열렸을 때 아무도 나가지 않는다.


내가 출구 없는 방(NO EXIT)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너에게는 출구가 없다"라는 뉘앙스의 말을 들으면 안심했다. 그건 아마 상대방이 나를 떠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렇게 나라는 방에 있는 상대방을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했다. 내가 타인에게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의 크기는 곧 나의 존재감을 의미했다. 팜므파탈하면 으레 떠오르는 남자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여자의 이미지가 좋았던 것은 그만큼 타인을 조종하는 힘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로 타인이 나로 인해 괴로운 게 좋을까? 사실 아니다. 나는 끔찍한 평화주의자라서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출구를 없애면 누군가는 남아있을 것이고 나의 존재감도 계속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원하던 힘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은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사르트르의 희곡처럼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 타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존재를 위협하는 스스로를 인식할 수도 있어야 하고, 온전히 홀로 있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출구는 꼭 있어야 한다. 사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Exit Everywhere, Mr.Dog


앞서 스스로의 매력을 확인하려고 했던 시도들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했었나? 사실 구라다. 나는 매번 처참하게 실패하고, 굴욕을 맛보았고, 비참하게 차였다. 내 첫 연애 상대는 일 년 넘게 나를 쫓아다니며 세상 사랑스럽다는 듯이 나를 보곤 했는데, 내가 드디어 마음을 열고 그를 사귀기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나를 찼다(이유는 현재까지 미스터리다). 내 첫 섹스 상대는 목줄을 하고 끌고 다녀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마조히스트였는데, 당시까지 순수했던 나는 그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키스를 할 때는 그의 목덜미를 깨물곤 했다. 그는 더 세게 깨물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 나도 안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소름 돋는다. 그런데 첫 섹스 이후로 차였다(이유는 알 것 같다. 본인의 취향에 딱 맞는 사디스트를 만난 것이다). 남몰래 짝사랑했던 동기는 내 베스트프렌드와 사귀고, 남녀가 섞인 친구들의 무리에서는 항상 내가 아닌 다른 여자애가 인기의 중심이 되고, 데이팅 앱에서 맘에 드는 이성을 절대 나를 like back 하지 않고, 등등. 말하자면 NO EXIT이 아니라 EXIT EVERYWHERE 수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나라는 방에 찾아와 주었다. 그곳에서 머물러 주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상대방으로 인해 지옥이 된 적은 없고 따뜻하고 아늑한 곳이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나라는 방이 좋다. 출구 많고 허술한 내 매력도 좋다. 그게 그다지 파괴적이지 못할지라도, 아무 힘도 없을지라도, 때때로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할지라도.


나라는 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느낌이다. 난장판이고 탐닉할 것들을 쌓아두며 크리스마스에 혼자 술 마시고 청승 부리는 일이 빈번하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중


게다가 나는 더 이상 누군가 나를 떠나는 것이 두렵지 않다. 떠날 사람이면 떠나고, 돌아올 사람이면 돌아올 것이라는 초연한 마음가짐이 생겼다. 아마도 2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고등학교 때 절교했던 친구와 다시 연락이 닿아 이전처럼 친해지거나, 구애인과 쿨하게 인스타 맞팔을 하게 되는 등의 경험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새로운 이상향:
팜므파탈 말고 지중해 해변


어렸을 때부터 꿨던 꿈 중에 몇 가지 상징적인 꿈이 있다. 그중 한 꿈에서 나는 사람들이 복작복작한 방에 있었다. 가면 무도회장 같았다. 빨간색 카펫과 클래식한 벽지가 있는 우아하고 세련된 공간이었지만 어쩐지 답답했다.



그러다 구석의 어떤 문을 발견하고 문을 열었는데, 예상하지 못하게도 엄청나게 큰 해수욕장이 있었다. 해변은 한적하고 바다는 눈이 부실만큼 푸른색이고 저 멀리 돛단배가 잔잔한 바다 위로 지나가고 있었다. 아름답고 화창한 날이었다. 해변에는 남자가 혼자 앉아있었는데, 수영하기 위해 바다로 달려가는 나에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위험하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바다로 들어가 헤엄쳤는데, 헤엄치는 와중에도 그의 경고가 생각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이 꿈의 의미를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왕이면 그런 식이고 싶다는 거다. 탁 트이고 자유로운 공간, 해변에 앉아 나를 지켜봐 줄 사람. 바다는 언제나 넘실거리고 사방이 출구지만 나는 어디로 헤엄치든 결국 해변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꿈을 좀 더 최근의 내 취향으로 구체화하자면. 바다로 뛰어갈 때는 이왕이면 고급 스윔웨어 브랜드 에레스(eres paris)의 심플한 원피스형의 블랙 수영복을 입고 싶다. 긴 머리는 아무렇게나 바람에 휘날리고 피부는 약간 어둡고 건강하게 빛나면 좋겠다. 그리고 해변에 앉아 있는 남자는, 청량한 날씨와 어울리는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밀짚모자를 살짝 걸치면 좋겠다. 그가 무심한 것 같기도 걱정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 결국 즐겁다는 듯 웃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겠다.


바다는 언제나 넘실거리고 사방이 출구지만 나는 어디로 헤엄치든 결국 해변으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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