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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님 Jun 01. 2018

돌아와 줘, 핫핑크 스웨터

나의 두 사람



어느 해 가을. 어디선가 털실을 구해 온 할머니는 부지런히 뜨개질을 시작했다. 그해 할아버지는 먼 타지에서 일자리를 구해 몇 주 동안 집을 비웠고, 할머니는 뜨개질 덕분에 오랜만에 생기를 찾은 모습이었다. 나는 바닥에 등을 기댄 채 골똘히 집중하는 할머니의 옆얼굴과 실을 감고 뜨는 손의 분주함을 지켜보곤 했다. 20년은 지난 일이라 무채색에 가까운 장면이지만 털실의 색깔만은 선명하다. 산동네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핫핑크였기 때문이다.     


두 달 동안 할머니가 공들여 만든 것은 짜임이 튼튼해 보이는 ‘세타’였다. 할머니는 스웨터를 세타라고 불렀다. 너는 얼굴이 하얘서 분홍색이 잘 어울린다고, 할머니는 완성된 스웨터를 내 몸에 대 보며 한번 입어 보라 말했다. 따로 치수를 잰 것도 아닌데 품과 팔 길이가 꼭 맞았고, 무엇보다 따뜻했다. 그만큼 할머니는 솜씨가 좋았다.


그런데 그 스웨터가 나는 좀 부끄러웠다. 그때는 왜 할머니의 스웨터를 입는 일이 우리 집만의 비밀을 들키는 일 같았을까. 핫핑크 스웨터를 처음 입고 학교에 가던 날 나는 집에서 나오자마자 스웨터를 벗어 가방에 넣었다. 부피가 커서 잘 들어가지 않는 스웨터를 구겨 넣으며 마음이 불편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꺼내 입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도착해 교실에 앉은 친구들의 옷들을 살펴보며 역시 입지 않길 잘했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그날따라 할머니가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처 가방에 있는 스웨터를 꺼내 입지 못한 나는 당황했다. 그 자리에 서서 스웨터를 꺼내 입으려 우왕좌왕하는 나를 두고 할머니는 말없이 집으로 들어갔다. 그게 아니고, 더워서 잠시 넣어 놨던 건데……. 말해 보아도 할머니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집으로 따라 들어간 나에게 할머니는 당장 스웨터를 벗으라며 소리를 질렀다. 어쩔 줄 몰라 두 눈만 껌뻑거리던 나를 할머니는 상기된 얼굴로 바라보았다. 화가 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했던 얼굴. 어떻게 너까지 나한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할머니는 소리 내 울었다. 그 말만 하고 방으로 들어간 할머니는 늦은 저녁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할머니에게 상처를 주었구나. 셋이서 함께 지내던 친구들이 나를 제외하고 둘만 눈빛을 주고받을 때 마음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 같았는데, 그런 비슷한 것을 내가 할머니에게 주었구나. 그런 식으로 짐작은 했지만 사실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스웨터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 하나로?     

그날 이후 할머니는 한동안 날카로웠고, 어쩐지 억울하기도 했던 나 역시 데면데면 굴었다. 핫핑크 스웨터는 그 후로 영원히 볼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문득문득 스웨터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에도 보풀이 생겨났지만 풀리지 않는 올처럼 미안한 마음은 그대로 남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때 할머니는 외롭고 힘든 시간을 홀로 버티고 있었던 것 같다. 끝을 알 수 없는 막막한 어둠이 할머니 삶에 스며들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나 역시 깜깜한 어둠 속을 혼자 건너 본 적 있듯이. 할머니가 스웨터를 짰던 날들은 스스로를 묵묵히 견디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제 와 겨우 짐작을 해 볼 뿐이다. 만약 그랬다면 할머니는 어린 나뿐인 그 집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주 가끔 그날로 돌아가는 상상을 해 본다.     


핫핑크 스웨터를 입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

마침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

집으로 돌아오는 핫핑크가 가까워지면

당신의 얼굴엔 어느새 환한 미소가.








책 <나의 두 사람>에 수록된 글 '돌아와 줘, 핫핑크 스웨터'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https://brunch.co.kr/@20150127/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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