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사람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나. 우리 세 식구는 내가 열 살이 되던 해 산동네로 이사를 했다. 그전까지 할머니는 울산에서 작은 슈퍼마켓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슈퍼 안쪽에 딸린 작은 방에서 함께 살았다.
할아버지는 한창 공사장을 다니던 때였는데 소화가 잘되지 않아 찾아간 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곧바로 위의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과 항암치료를 병행했고 할머니는 암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으니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자 했다고 한다. 그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나이가 각각 59세, 58세. 그들은 평생 모은 돈으로 소문을 듣고 찾아간 산동네의 땅을 샀다. 할아버지는 공사장 동료들과 함께 우리가 살게 될 집을 지었다.
집이 완성되기 전 어느 여름밤. 그 집에 가서 함께 잔 적이 있다. 불도 켜지지 않는 거실 시멘트 바닥에 이불을 깔고 우리 셋은 나란히 누웠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문이 달리지 않은 창밖으로 네모난 어둠이 떠 있었다. 어려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날 밤 두 사람은 조금 들떠 있었던 것 같다.
“여기가 우리 집, 우리 집이에요.”
누구보다 부지런히 살았지만
늘 어딘가에 딸린 방에 살아왔던 사람들.
평생 살아온 도시와는 동떨어진 외지에서 살게 되었지만
드디어 그들도 자신들의 집과 고유한 주소를 가지게 되었다.
이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와 나는 마당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반층 정도의 계단을 함께 만들었다. 내가 자동차 트렁크에 실려 있는 납작하고 둥그런 돌을 계단 입구로 나르면 할아버지는 꼼꼼하게 시멘트를 발라 계단 모양을 완성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어린아이의 보폭만큼 낮고 너른 계단은 평생 계단 오르는 일을 힘들어했던 할머니를 위한 작은 선물이었다.
올해로 스물두 살이 된 집. 그 집엔 세 식구가 보낸 시간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할머니가 바깥을 자주 구경하던 집. 할아버지가 가꾸던 텃밭에 계절마다 다른 작물들이 자라나던 집. 항아리에서 고추장, 간장, 된장이 나란히 익어 가던 집. 산바람에 빨래가 펄럭이며 구김 없이 마르던 집. 늦은 오후,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던 집. 때마다 할아버지가 도배를 새로 하던 집. 여름날엔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아 수박을 나눠 먹던 집. 가을이 되면 장대를 이용해 할아버지가 감을 따던 집. 어떤 곳보다 어둠과 겨울이 빨리 찾아오던 집. 도시에선 보기 힘든 눈이 무릎까지 폭 폭 쌓이던 집. 눈사람을 만들어 놓으면 할아버지가 숯으로 눈썹을 그리던 집. 책 읽는 걸 좋아한 한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어 도시로 도망치듯 떠난 집. 겨우 도망쳤다 싶으면서도 자주 돌아봐 그림자처럼 남아 있는 집. 누가바와 비비빅을 좋아하는 노부부가 함께 늙어 가는 집.
어느 날 할머니는 자신이 죽으면 이 집은 나에게 물려준다고 말했다. 아빠랑 고모를 줘야지 왜 나를 줘, 물으면 그래도 이 집은 나를 주고 싶다 했다. 유언장도 그렇게 써 놓을 거라고.
“너 결혼할 때 다른 건 못 해 줘도 이 집 하나 줄 수 있다는 거. 그게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지?”
그 말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집을 왜 날 줘. 할머니 할아버지가 여기서 평생 살아야지.”
가끔씩 혼자 사는 방에 켜진 불빛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스스로 켜고 끄는 1인분의 불빛이 외롭고 막막해질 때가 있다. 그런 날엔 잊지 말고 기억하기를. 해가 짧아진 어느 겨울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나를 기다리고 있던 노란 불빛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그들이 영원히 집을 떠나게 된다 하더라도
그 집은 언제나 우리 셋, 우리들의 집.
/ 책 <나의 두 사람>에 수록된 글 '우리들의 집'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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