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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님 Jun 08. 2018

독립하던 날

나의 두 사람



고등학교 3년 동안 난 친구들 사이에서 지나치게 들떠 있거나 급격히 가라앉길 반복했다. 예민한 시기였고 할아버지가 일을 그만둔 뒤로 일정한 수입이 끊겨 집안 형편이 가장 어려울 때였다. 열여덟의 나는 급식비를 내지 못해 칠판에 이름이 적혔고 다음 수업 때까지 준비해 오라는 문제집을 살 돈이 부족해 가슴을 졸였다. 열아홉, 대입을 앞두고 학부모 상담에 온다던 아버지는 결국 오지 못했고 그날 나는 학교 화장실에 숨어 울었다. 학교 안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 행복한 일도 많았지만 예감하지 못한 순간에 내가 선택하지 않은 불행들이 자꾸만 나를 넘어뜨렸다. 억울하고 분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내겐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등록금 걱정 없이 대학교를 다니려면 무조건 국립대를 가야 했다. 수능 성적이 기대보다 낮아 수도권에 있는 국립대학교는 지원이 어려웠다. 최대한 여기를 벗어나 무리 없이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다른 지역에 있는 국립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해야 했다. ‘가’군에서는 선생님의 권유로 국립대 사범대로 상향 지원했다. 선생님께서 원서비까지 내주시는 바람에 얼떨결에 원서를 넣었는데 몇십 번대 예비 후보가 되었다. ‘나’군에서는 부산에 있는 대학교에 지원했고, ‘다’군에서는 창원에 있는 대학교에 원서를 냈다. 창원은 처음 들어 보는 도시였는데, 그런 이유로 창원이 마음에 들었다. 결국 두 학교 중 창원에 있는 국립대학교에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다행히 입학 등록금을 면제받았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네 자식들은 모두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전부 할머니의 입을 통해 들은 이야기지만 자식들마다 꽤 구체적인 이야기가 뒤따랐다. 큰딸은 육영수 여사의 장학금을 받아 선생님들이 가마를 태워 집으로 데려왔다는 이야기, 주인집 아들과 같은 반이었던 하나뿐인 아들은 우등상을 놓친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 그뿐인가. 몸이 약한 둘째 딸은 위의 두 형제보단 못해도 곧잘 공부를 잘하는 데다 미술 솜씨가 좋았다는 이야기, 말괄량이 막내딸은 입학한 지 얼마 안 돼 ‘저능아’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한 달을 바짝 공부하더니 우등상을 쓸어 왔다는 이야기까지. 그런데 네 명의 자식은 모두 공부와 상관없는 길로 빠졌다. 할머니는 가난이 너무 깊어서라고 했다. 자식들이 이길 수 있는 가난이 아니었다고.      


할머니의 말대로 그들이 정말 공부를 잘했다면,

내 자식은 출세할지 모른다는 믿음이

도미노처럼 무너질 때마다

할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는 우리 집 최초의 대학생, 최고 학력을 가진 자식이 되었다.   

  

대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기로 했다. 고등학생 때도 평일에는 기숙사에서 학교를 다니고 주말에만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했지만, 대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면서는 완전히 집에서 독립하는 기분이 들었다. 함께 부대끼며 살아온 한 시절이 끝나고 이제는 그들과 별개의 삶이 시작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을 할 때 할머니는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토요일만 기다리곤 했는데, 이젠 한 달에 한 번 찾아오기 힘들지도 몰랐다. 자주 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한 주의 짐이 아니라 넉넉히 한 학기의 짐을 미리 챙겨야 했다.     


기숙사로 떠나기 전날, 할아버지는 시내로 나가 새 이불과 스탠드, 나이키 점퍼를 사 줬다. 점퍼는 내가 가진 유일한 메이커 옷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여느 날처럼 바닥에 이불을 깔고 셋이 나란히 누워 잘 준비를 했다. 잠들기 전, 할머니는 내가 없는 방이 벌써 허전하다고 말했다. 내가 일러 주지 않으면 늘 드라마 시간을 놓치던 할머니는 앞으로도 계속 본방송을 놓치게 될 거였다. 사소하지만 그런 게 마음에 걸렸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가능한 한 빨리 이곳을 떠나길 원했지만

정작 떠나게 되었을 땐

그들을 두고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도망친다고 생각해서 두 사람에게 미안했다.     


다음 날 보자기에 싼 이불과 짐들을 할아버지 차에 싣고 세 가족이 함께 창원으로 향했다. 청도와 밀양을 거쳐 두 시간 넘게 차를 타고 가야 하는 도시였다. ‘어서 오세요. 여기부터는 창원시입니다.’ 지역 경계선을 지나 들어선 창원의 첫인상은 깔끔했다. 창원이 국내 첫 계획도시라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났다. 쭉 뻗은 도로를 따라 도착한 창원의 중심가엔 커다란 로터리가 있었다. 끊임없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차들과 함께 로터리를 돌자 시청 건물과 3층짜리 대형마트, 백화점과 고층 상가 건물들이 차례로 보였다. 모두 경주엔 없는 것들이었다. 그제야 다른 도시에 왔다는 실감이 나 촌스럽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창밖을 보며 할머니가 물었다.


“창원도 큰 도시인가 보죠?”


할아버지는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그럼. 큰 도시지.”     


나는 뒷좌석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이상하게 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는 길엔 신입생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할머니는 정문에 새겨진 학교 이름을 또박또박 따라 읽었다. 처음 본 대학교 건물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우리는 차에 탄 채로 캠퍼스 전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중앙에 있는 건물은 본관, 저곳이 내가 수업을 들을 인문관, 이건 뭐지? 아, 도서관인가 보네.”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키며 말을 꺼낼 때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동시에 “아~” 하고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산한 캠퍼스에 드문드문 학생들이 지나갈 때마다 괜스레 긴장이 됐다.      


기숙사는 캠퍼스의 왼쪽 끄트머리에 있었다. 기숙사 앞은 여러 도시에서 온 차량들과 짐을 옮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도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 싣고 온 짐을 기숙사 2층 방으로 옮겼다. 두 사람이 함께 쓰는 방은 너무 좁아 금세 침대가 짐으로 가득 찼다. 룸메이트가 방에 있어 대충 짐을 정리할 새도 없이 할아버지를 따라 내려갔다. 해가 지기 전 집에 도착하려면 서둘러 출발을 하는 게 좋았다. 차 문을 열고 언제나처럼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했다. “그래. 문단속 잘하고, 밥 잘 챙겨 먹고. 그래, 그래.” 조수석 차창 너머로 할머니가 손을 흔들었다. 나도 따라 손을 흔들며 익숙한 자동차 불빛이 천천히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혼자였다. 쓸쓸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4년 후, 나는 단과대학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했고 온 가족이 졸업식을 보러 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처음으로 학사모를 써 봤고 할아버지는 학사모를 쓴 채로 나와 사진을 찍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다 함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을 때 처음 창원 시내 로터리를 함께 돌던 때가 생각났다. 이 정도면 잘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책 <나의 두 사람>에 수록된 글 '독립하던 날'입니다. 그러고 보니 독립한 지 벌써 11년이 지났네요.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https://brunch.co.kr/@20150127/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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