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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시간이 약이라고 말하지만 그 지나가는 시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나를 할퀴고 갉아먹는지 아는 사람은 알고 있겠죠. 물론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는지 알 수도 없이, 그때의 기억은 까맣게, 심정은 잊히게. 그렇게 되겠지만, 아니 그렇게 믿으려고 사실은 노력하겠지만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참 위로가 되려고 하는 말 같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에게, 아픈 사람에게, 그냥 견디면 된다고, 기다리면 된다고. 마치 감기약처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나을 거라고 말이죠. 하지만 정작 그 시간을 견디고 있는 당사자에게는 그 약이 얼마나 썼는지, 얼마나 삼키기 힘든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시간은 아픈 기억을 지우는 게 아니라 그 위에 새로운 일상을 덧칠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거든요. 마치 상처 위에 반창고를 붙이듯이,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거죠.
어떤 날은 정말로 조금 나아진 것 같다가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 아픔이 다시 고개를 듭니다. 익숙한 향기, 우연히 들린 노래, 비슷한 상황. 그럴 때마다 "아, 나는 아직 여기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이 쓴 약을 계속 삼키게 됩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까요. 시간을 멈출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으니까. 그냥 하루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일분일초를 견뎌내는 거죠. 때로는 울면서, 때로는 화를 내면서, 때로는 그냥 멍하니.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지만, 그 약이 효과를 보려면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완전히 낫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갈 만큼만 무뎌진다는 것을. 흉터가 아예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냥 덜 아프게 되는 것처럼요. 어쩌면 시간이 주는 것은 치유가 아니라 적응일지도 모릅니다. 아픈 현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천천히 배우는 것. 상처를 안고도 웃을 수 있게 되는 것. 그게 시간이 주는 진짜 선물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 쓴 약을 삼키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빨리 나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시간은 흐르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화하고 있을 거라고.
지금은 너무 쓰지만, 언젠가는 그 쓴맛도 익숙해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