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나 Jun 03. 2021

이사갑니다. 더 나은 삶을 희망하며

증기선과 산업도시의 화가 <윌리엄 터너>

이사를 마쳤다.


서울에서 서울로의 이사였고, 생활 터전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엄청난 변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사’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사는 나를 둘러싼 육면체의 공간이 전면 바뀌는 일이다. 그러니 물리적 거리가 어떠하든,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의 이동은 당사자에게 새로운 삶의 국면을 의미한다. 소소한 이사였지만 새로운 공간과 새 삶의 방식에 대비해 원래 일상의 많은 부분을 정비하고, 정든 곳과 이별할 충분한 준비를 해야 했다.


근 몇 주는 버려야할 것들과 사투를 벌였다. ‘혼자 사는 집에 웬 짐이 이리 많은지.’ 한창 투덜대며 짐 정리를 하던 주말 어느 날이었다. 몇 번의 분리수거를 거쳐 옷 수거함까지 꽉꽉 채우고 돌아온 나는, 남은 일거리를 무시한 채 잠시 누웠다. 무심하게 휴대폰 화면을 쓸어올리던 중, 한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경상도에서 24년째, 정말 서울 가야 취업하나요?’라는 제목의 영상이었다. 이사를 앞두고 공감 지수가 올라간 까닭인지, 가까운 이사로도 이렇게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데 멀리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귀찮을까 생각하며 영상을 시청했다.


영상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취업을 준비중인 현주 씨의 이야기였다. 진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취업을 위해서는 서울을 기웃대야 하는 현실, 정말로 취업이 된다면 서울에서 혼자 살아가야할 막막함, 이와 공존하는 서울살이를 향한 막연한 기대와 설렘까지. 짧은 영상에 담긴 한 사람의 이야기는 내가 미처 돌아보지 못한 현실을 마주하게 했다. 


간단한 이사를 앞두고 ‘이사=귀찮음’이라는 단순한 공식으로 정의하고 있던 내 모습이 철부지 같아 순간 부끄러웠다. 대개 이사는 살아온 모든 터전과 환경을 벗어나 완전히 낯선 세상으로 진입하는 일이다. 거하는 공간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한발 앞서 앞으로 내가 할 일, 만날 사람, 생활 방식 등이 전부 바뀌어야만 한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누가 강제로 이동을 시키겠냐마는, 모든 이사가 100퍼센트 자의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었다. 익숙하고 편한 공간에 있고 싶어도, 크고 작은 이사를 단행할 수밖에 없는 갖가지 이유들이 있다. 누군가는 더 많은 기회를 찾아서, 또 다른 누군가는 원래의 보금자리를 잃어버려서, 두려움과 설렘이 혼재하는 마음으로 낯선 땅에 발을 내딛었다.


이사의 이유가 무엇이든, 이사를 하며 더 나은 미래를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자의로든, 타의로든 새로운 터전에 들어갈 때에는 그곳에서 펼쳐질 새 삶을 희망으로 그려보기 마련이다. 거처를 옮긴다고 사람이나 사회가 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삶의 공간이 바뀌는 만큼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 이사는 그런 부푼 희망이 피어나게 한다. 



도시로 떠나는 사람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19세기 낭만주의 화가.


이사를 생각할 때 나는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그림들이 떠오른다. 영국의 국민화가 윌리엄 터너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이 개화하고 만개하는 시대에 살았다. 런던에서 산업화의 일거수일투족을 목격하며 자란 그는 그 시대의 상징과 같은 증기기관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18세기 말 증기기관의 개량으로 시작된 영국의 산업화는, 증기기관이 선박과 열차에 접붙여지면서부터 비로소 모터를 달았다. 사람과 물자를 싣고 거침없이 달리는 증기선과 증기기관차는 당대인들의 경외심을 자아냈다. 난생 처음 목격한 그 속도감에 그들은 스스로 일군 문명의 괴력을 단번에 실감했다.


터너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터너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산업혁명을 예술의 소재로 받아들였다. 그의 대표작 「비, 증기, 속도」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빠르고 강하게 쏟아지는 비를 몸소 피부로 체험한 결과물이었다. 산업기계와 자연이 얽혀 만들어내는 장관은 터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윌리엄 터너 <비, 증기, 속도> (1844)


열차 이전에 그가 더 자주 그린 소재는 증기선이었다. 19세기 초, 열차보다 먼저 상용화된 증기선은 주로 연안과 근해에서 여객 운송을 위해 사용되었다. 여행가이자 모험가였던 터너는 이 증기선을 타고 영국과 유럽 각국의 도시들을 왕래했다. 그 결과, 한창 발전 중인 산업도시의 항구는 터너 작품의 단골 주제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항구를 오가는 정기선과 도시민을 관찰하며 도시의 유동성을 화폭에 담아냈다.


윌리엄 터너 <쾰른, 정기선의 도착 : 저녁> (1826)


항구는 도시의 맨 가장자리로, 만남과 작별이 연속되는 무대다. 터너는 항구에 서서 도시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터너의 그림을 볼 때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 희망을 안고 이곳에 다다랐을지, 또 어떤 시간을 보내다 이곳을 떠났을지 그런 상상에 잠긴다. 터너는 여행객으로 잠시 도시에 머물렀으나, 그가 그린 항구 속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곳은 새롭게 정착할 삶의 터전이자 생계 현장이었다. 


도시는 태생적으로 유동적인 공간이지만, 19세기를 거치며 더 급격한 인구 성장을 겪었다. 먼저는 영국에서, 이후 서유럽을 넘어 동유럽까지, 도시화는 산업화와 함께 거스를 수 없는 시대 흐름이 되었다. 대표 주자였던 영국의 경우, 1800년대에 200만 명 수준이던 도시 인구는 1900년대에 30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가장 가파른 상승세를 경험한 런던의 인구는 1801년 90만 명, 1900년 500만 명, 1911년 700만 명으로 늘었다.


도시로 이동하는 이유는 ‘더 나은 삶’을 위해서였다. 도시에는 공장과 대자본, 다시 말해 일자리와 문화가 있었다. 이는 새로운 기회를 찾는 사업가, 노동자, 상인 그 누구에게라도 도시로 가야할 충분한 사유가 되었다. 그렇게 형성된 산업도시는 그야말로 이방인들의 세계였다. 대부분의 도시민들은 거기서 나고 자란 토박이가 아닌 타지로부터 유입된 정착민이었다. 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꿈과 이상을 품고 고향을 떠나왔다. 모두에게 낯선 이 공간은 매일같이 다른 사람, 다른 풍경, 다른 활동으로 채워지며 익숙해질 틈을 주지 않고 변화하고 발달하고 팽창해나갔다.


윌리엄 터너 <디에프의 항구>(1826)
<런던의 항구> (c. 1824)
<쾰른 강가>(Cologne from the River, 1820)



거주 이전의 '자유'


누군가 새 삶을 기대하며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있다면, 이는 기본적으로 그가 자유민(freeman)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포함한 각국의 헌법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인정한다. 세계인권선언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를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굳이 법적으로 명시해야 했던 이유는, 원래는 이러한 자유가 없는 상태가 역사적으로 더 유래 깊고 보편적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유럽의 봉건제에서 대다수 농민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중세 유럽의 경제는 부동 자산인 토지를 기반으로 했다. 즉, 토지 경작을 통해 생산되는 작물이 경제의 대부분을 구성했다. 이런 경제체제에서 농민은 토지에 묶여 있는 생산수단으로, 토지 소유자인 영주의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농민은 토지를 분여받은 대가로 그에 상응하는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기에 영주에게 인신이 예속되어 있었다. 영주 직영지에서 주 2~3회 부역을 수행했고, 인두세·혼인세·사망세 등 인신에 부과되는 세금을 내야 했다. 토지의 부속물과 같았던 농민들에게는 거주 이전의 자유뿐만 아니라 혼인의 자유, 직업 변경의 자유도 없었다. 이들은 노예와 자유농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농노들이었다. 그랬던 그들에게 어떻게 타 지역으로 이주하는 자유가 주어졌을까.


Joost Cornelisz Droochsloot <Village Street> (1646). 중세의 장원.


‘자유’란 그 단어가 내뿜는 희망의 크기만큼 잔혹함을 내포한 가치이기도 하다. 역사를 보면 특정한 자유의 증진은 다른 무언가의 박탈과 함께 이루어지고, 자유에 비례해 감당해야할 불안과 혼돈도 커지는 경우가 많았다.


봉건적 신분제가 비교적 빨리 와해된 잉글랜드의 사례를 보자. 1300년만 해도 잉글랜드 농민 대다수가 농노였으나 1500년경, 영주에게 인신이 예속된 농민은 거의 없었다. 이는 상당 부분 중세 말 화폐경제가 성장한 결과였다. 화폐의 가치성이 높아지자 영주들은 농노에게 제공받던 부역을 점차 화폐 지대로 바꾸어 받길 선호했다. 이러한 흐름은 시장의 활성화와 함께 더욱 거세졌다. 농노와 영주 사이에 현금을 기반으로 한 의무 이외에 다른 어떤 결속도 남아 있지 않다면, 이는 농노가 영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신체상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렇게 중세 봉건사회는 해체되어갔고, 영주와 농노의 관계는 근대적인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로 변해갔다.


이제 농민은 마음먹으면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었으나 평생의 생계 터전을 두고 굳이 타지로 떠날 이유는 없었다. 단, 꼭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닥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가 활력을 띠고 다양한 경제 주체들이 나타날수록, 누군가는 자꾸 기존의 터전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일례로 경작법의 발달, 무역과 시장의 확대 등의 변화는 이를 잘 활용한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을 명확히 구분해, 같은 농민 안에서도 부농과 빈농의 격차가 벌어지게 했다. 


16~17세기 잉글랜드에서 성행한 인클로저운동(Enclosure)은 이러한 상황을 가속화했다. 인클로저는 소유권이 불명확한 공유지나 경계가 모호한 사유지에 울타리를 쳐서 자기 소유를 명확하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과열된 토지 소유 경쟁으로 인해 산재되어 있던 소규모 경작지 대부분이 대농장으로 병합되었다. 평생 농사 짓던 땅을 잃은 소작농들은 대농장에 취업해 임금노동자로서 생계를 이어갔다. 좋게 말하면 노동의 유연화였지만 농민들이 처한 현실은 하루벌이의 불안정한 생계였다. 결과적으로 인클로저는 자본가와 노동자를 동시에 대거 양산함으로써 다가올 산업화 시대를 대비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잉글랜드 인클로저 운동


한편 임금노동자가 된 농민들이 본래의 생활 터전에서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농업 생산기술의 지속적 발전은 경작에 필요한 인력이 계속 감소할 것임을 의미했다. 더욱이 모직물 공업의 발달로 이미 많은 농경지가 목축지로 탈바꿈된 터였기에 이런 지역에서는 노동 수요가 더 급감했다.


동시에 도시는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자본, 기술, 상품이 몰리는 도시는 계속해서 새로운 직업과 삶의 양식들을 창출했다. 이제 농민들에게는 도시민이 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그들은 더이상 토지에도 지주에게도 예속된 존재가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도시의 기회를 맘껏 탐험할 수 있는 이동의 자유가 그들에게 주어져 있었다.


누군가는 도시의 삶을 동경하며, 누군가는 등쌀에 떠밀리듯,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의 새 삶을 택했다. 이미 16세기부터 영국은 전보다 더 유동적인 사회가 되었고, 18세기 공업화와 함께 본격적으로 도시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근대적 자유민이 행사한 ‘거주 이전의 권리’의 이면이었다.



도시에서의 새 삶


윌리엄 터너 <르아브르, 해질녁의 항구> (1832)


윌리엄 터너는 산업도시의 화가였으나 도시의 끝자락에서 도시를 관망하는 편을 택했다. 그의 시선은 철저히 제삼자의 시선에, 도시의 내면이 아닌 외관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풍경에 자기 감정을 실어 감상하는 낭만주의 화가이지, 현실을 고증하려는 사실주의 화가는 아니었다.


도시는 그 역동성과 활기만큼 복잡한 면모를 갖춘 공간이다. 터너가 보여주는 도시는 보다 감성적이고 낭만적이다. 그의 도시는 생기를 띤 채 살아 움직이고 있고, 이곳에서라면 무엇이든 새로운 기회를 잡아 새 삶을 펼쳐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역시 도시가 지닌 한 면모다. 나 또한 도시의 흥밋거리와 도시가 주는 설렘을 좋아한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도시로 이사해온 사람들, 특히 원래의 생계를 잃고 도시를 찾은 이들의 도시 정착기가 그리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19세기는 각종 도시문제가 대두된 때였다. 한정된 공간에 인구가 몰려들자 유럽 대도시들은 곧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도시의 고질병인 주거, 위생, 범죄, 빈민 등의 문제가 심화됨과 동시에 산업화로 인한 색다른 문제들까지 발생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새로운 노동환경에 따른 노동문제, 새로운 생산방식에 의한 환경오염문제였다.


악화된 도시문제의 주범은 공장이었다. 쉼 없이 일하는 기계로 채워진 공장은 인간의 본성, 자연의 섭리와는 대치되는 일터였다. 이곳에서는 아동과 여성들도 하루 18시간 이상 노동할 수 있었고, 그렇게 밤낮 돌아가는 공장은 폐수와 매연을 끝없이 배출했다.


산업화는 기세등등하게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야기할 난점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도시는 꽤 오랜 시간 자기정화능력을 상실한 채 마땅한 해결책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모든 풍파를 직격으로 맞아야했던 것은 도시 가장 변두리에 있는 이주 노동자들이었다.

 

귀스타브 쿠르베 <돌을 깨는 사람들> ㅣ <곡물 체질하는 여인들>
오노레 도미에 <삼등열차>(1862-4). 19세기 중후반 사실주의 화가들은 그동안 다뤄지지 않은 노동자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영국을 중심으로 살펴본 근대화와 도시의 역사는, 대부분의 산업국가가 저마다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비슷하게 경험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어느 시대든 그 나름의 낭만과 고충이 있기 마련이기에, 특정 시대를 향해 무조건적인 향수를 갖기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고 싶지도 않다. 복잡다단한 인류의 역사를 지배와 피지배라는 단순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나는, 언제 어디에 사는 누구라도 그가 소망하는 ‘더 나은 삶’을 좀더 자유롭게, 좀더 안전하게 펼칠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19세기 도시 노동자들은 이렇다 할 미래를 꿈꿀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안정된 삶을 영위하지 못했다. 그들도 한때 부푼 기대를 안고 도시를 찾아왔지만, 막상 마주한 현실 앞에서 삶이란 여기서든 저기서든 살아내기 어려운 혹독한 과정이라며 그렇게 단념해야 했다.


이후 한 세기 넘게 세계 각국은 갖은 갈등과 반목을 겪으며, 변화된 사회에 필요한 최소한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과거보다 나은 현재가 되었고, 원하는 공간에서 원하는 삶을 펼치기에 조금은 더 이상적인 사회가 되었다고 믿는다.


지금도 많은 이들은 새로운 삶을 희망하며 시골에서 도시로, 지방에서 수도로, 혹은 그 반대로 이동하고 있다. “정말 서울 가야 취업하나요?”라고 묻는 영상을 보며, 과거의 역사가 그저 과거만의 이야기는 아님을 실감했다. 서울은 기회의 땅, 설렘 가득한 곳이지만, 여전히 이방인의 세계이며 모두에게 편한 보금자리는 아니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고,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 하는 이상한 도시. 서울은 아직 그런 곳이다.


윌리엄 터너 <달빛 아래 석탄을 싣는 선원들>(1835)


터너가 좋아했던 항구는 여정의 끝자락이자 새 출발지다. 출항을 위해 배에 몸을 실으면 시야 가득한 망망대해에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하지만, 이내 그보다 더 큰 흥분이 솟아난다. 그 힘으로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곧 새로운 항해를 시작할 사람들, 그리고 이제 막 목적지에 닻을 내린 사람들. 막막함과 기대가 뒤섞인 그 복잡한 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단지 그들을 응원하고 싶다. 당신이 가는 곳이 어디든, 그곳이 당신에게 더 좋은 삶의 터전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어디에나 슬픔과 괴로움은 있지만 그곳에서 당신이 기대하는 새 삶을 꾸리며 과거보다 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참고문헌


1. Ackroyd, Peter. London: The Biography (London : Chatto & Windus, 2000).

2. Bradley, Harriett. The Enclosures in England an Economic Reconstruction (Kitchener : Batoche Books, 1918)

3. Flanders, Judith. The Victorian City: Everyday Life in Dickens' London (London : Atlanti Books Ltd, 2012).

4. Rudé, George. Hanoverian London 1714–1808 (Sutton, 2003).

5. 박지향. 『클래식 영국사』(김영사, 2012).

6. 이영림, 주경철, 최갑수. 『근대유럽의 형성 16-18세기」(까치, 2011).



2주만에 뵙습니다!

무사히 이사를 마치고 새 공간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또 다음 글로 뵙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비오는 날의 무기력함 벗어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