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다루기 2
분노는 권위에서 나온다.
살면서 분노나 증오를 다루는 일은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힘을 적절한 허용과 절제를 통해 삶에 유익하게 써야 한다. 분노나 증오 같은 힘은 특히나 우리가 그 힘을 파악하고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어떤 경우 우리의 삶 전체를 집어삼키기도 한다.
분노나 증오가 나오는 힘의 원천은 권위다. 나는 이 힘의 원천을 통찰하고서 비록 한 단면이겠지만 학창 시절의 나를 보고 그때의 교사를 보고 그리고 또 사회를 볼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평생 권위를 추구한다. 이 권위는 "사람 간에 인정되는 위치"라고 정의해 두자. 물론 낮은 위치가 아니라 높은 위치다. 그리고 이 위치는 다분히 심리적인 것이지만 실제로 관계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이다.
초등학생이라고 하더라도 반장을 해보거나 혹은 선생님의 신임을 얻는 친구라면 쉽게 이 권위의 맛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둘 이상이 있는 작은 소집단에서부터 어김없이 생겨나는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지, 사람이 성장한다거나 혹은 성공했다는 말 안에는 그의 귄위도 커져가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 권위는 자아정체성 즉 나라고 하는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사람들은 이 권위를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거나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점차로 이 권위는 나라는 정체성의 틀을 형성하면서 사람들에게 나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뭔가가 된다.
즉 내가 사람들 사이에 권위(때로는 명성)가 있으면 나는 쉽게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거나 짓밟히지 않을 수 있으며, 내 말과 행동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호응되며 더 나아가 사람들의 귀감이 되거나 모델 혹은 멘토가 될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다 해도 안정적인 직업과 일이 보장되는 등 실 생활에도 대단히 유용한 틀이 된다.
그래서 살면서 나아간다고 하는 일은 이 권위가 커지는 일이다. 학생에서 교사가 되고 교사에서 교감이나 교장이 되고, 평사원에서 대리 과장 등을 거쳐 승진을 하는 일 등 거의 모든 일들이 그렇다.
분노는 자신의 권위의 손상에 대한 보상 행위
분노는 보통 무의식에 있는 이 권위가 손상되거나 도전받거나 무시되거나 할 때 생겨난다. 화가 날 때 가만히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지켜보라. 내가 한 말이나 일 혹은 행동이 상대에게 무시되었다고 느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이때 분노가 일어나지 않으면 좌절이 일어나는데 좌절은 분노보다 에너지 레벨이 더 낮은 것이라 그 당사자에게는 더 위험하다.
보통의 건강한 자아라면 내 말이나 행동 혹은 내가 한 일이 상대에게 무시되었다고 느낄 때 분노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무의식 더 깊은 곳에는 자아의 권위가 있다.
'네가 감히 날 무시해?'
' 날 무시해선 안 되지!'
'날 무시할 수 없어!'
하는 것이 깔려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이 권위가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다.
한때 학교 교사들의 경우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아이들)을 가장 많이 때리는 직업이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들이 사랑으로, 아이들을 때렸을까? 많은 경우 교사들은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늦거나 숙제를 빼먹거나 하는 등의 사소한 일에서도 아이들을 때렸는데 그 깊은 곳에는 아이들이 자기의 지시를 무시했고 그러므로 자신의 권위가 손상된 것에 대한 보상하는 행위로 아이들을 때렸던 것이다. 자기 권위가 무시되었을 때 그 상대를 더 에너지가 낮은 레벨로 끌어내려야 자신의 권위가 지켜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이들을 때려서 기가 죽게 하고 억눌렀던 것이다.
교장선생님인 할머니가 초등학교 갓 입학한 손녀 숙제를 봐주다가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자 손녀 따귀를 때리는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는 나에게 그 쪼그만 애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했다. 그래서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아이는 할머니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다만 놀고 싶은 것이고 좀 더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러나 어른의 마음속에는 아이들의 그런 순수한 행동에도 손상되는 권위라는 것이 이미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권위적인 사람일수록 아이들 교육에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을 억누르고 기를 죽이는 이런 행위는 아이들의 공부에도 그리고 성장에도 대단히 좋지 않다. 교육의 장에서 행해졌던 이런 폭력들은 아이들의 형생에 걸쳐서 가장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이다.
교사들의 폭력이 실상은 아이들을 사랑해서가 아닌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자 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진작에 통찰했어야 했다.
권위를 내려놓는 선생님들
근래 유튜브에서 정말 멋진 동영상을 하나 발견했다.
https://youtu.be/amh10 hdy0 mA
이 선생님은 자신이 교사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던 것을 어느 날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학생을 가르치는데 꼭 그것을 가져야만 하는가 하는 통찰을 했을 것이고 그래서 권위를 내려놓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학생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반말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교사로서 권위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그 자신에게는 어떤 일일까? 이 선생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 더 있는 것일까? 나는 정말 그 속 이야기가 궁금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교사들이 이렇게 무의식 속 권위에 대한 욕구를 통찰하고 그것을 다루어내면 교사에게서 학생에게로 훨씬 더 많은 사랑이 흐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억압되지 않을 것이고 훨씬 더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필요한 공부들을 해 나가게 될 것이다. 그때 교사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가이드를 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아는 훌륭한 교사들은 학생들을 때리지 않았다. 그들은 아이들과 의사소통을 하려고 눈높이를 낮추고 또 낮추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는 한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돌아다니고 싶으면 돌아다니게 하고 자고 싶어 하면 자게 했다. 그는 선생이란 권위로 아이들을 강제하지 않았고 억압하지 않았다. 눈도 쳐다보지 않고 말도 하지 않던 아이들이 시간이 흐르면 선생님과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나 자기감정 이야기를 하고 진로를 걱정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사실상 공부를 거부하고, 자신을 포기하는 행위들은 사실상 그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종의 저항이다.
부모나 선생의 권위는 결국 아이들을 억압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아이들을 때리고 억압하여 자신의 손상된 권위를 보상하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무참하게 무너진 자신의 권위를 보상하거나 다시 세울 방법이 없다. 할 수 있다면 자기보다 약한 친구를 괴롭히거나 혹은 폭력 서클에 가입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도 할 수 없는 아이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학교를 다닐 뿐이게 되는 것이다.
서로의 권위를 인정하면 존중이 된다.
권위의 문제는 절대로 교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사회 모든 직업군이 그렇고 부모와 자녀 간에도 권위의 문제가 있다. 만약 관계 속에서 분노나 증오가 일어나는데 마땅히 그 원인을 모르겠다면 그리고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느껴진다면 그 이면에 자신의 권위에 대한 고집이 있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그것이 잡히면 조금만 더 넓게 시야를 넓혀 보면 분노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며 다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권위란 내가 너보다 우위에 있다는 그래서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하고 나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무의식적 강요라는 것을 통찰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실상 공정하지 못한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내 무의식 속에 그런 권위에 대한 고집이 있다면 상대방이 아무리 어리든 나약하든 그에게도 똑같이 권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상대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면 그도 자유롭게 자기 의지대로 하고 싶을 수 있음 이 인정될 것이다. 그러면 곧바로 분노로 가지 않을 것이다. 그 둘 양쪽 모두에게 동등하게 인정되는 권위란 곧 존중받을 권리로 변화될 것이다.
그렇다. 반말을 하든 하지 않든 정말 필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학교든 직장이든 사회에서든 서로를 존중하는 그것은 아직도 너무도 크게, 그리고 아주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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