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작가 Apr 30. 2019

제주 한달살기, 삶과 여행 사이

제주에서의 한 달, 늘 여행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빨래하기 좋은 날


요 며칠 봄날이 끝난 것처럼 제주의 '고사리 장마'가 찾아왔다. 늘 그렇듯, 우중충하던 지난날은 끝이 나고 거짓말처럼, 맑은 아침이다. 수분기 하나 없는 뽀송한 바람과 이마를 달구는 뜨거운 햇빛. 이런 날엔 빨래를 해야 한다. 눈 뜨자마자 세수보다도 급한 건 밀린 빨래를 모으는 일. 세탁기 돌아가는 걸 하염없이 보다 보면 어느새 해가 중천에 뜨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별 볼 일 없는 제주에서의 나의 하루.






#온 동네 사람들 장 보러 가는 날, <세화 오일장>


행원리 옆 동네인 세화리는 나름 구좌읍에서 큰 동네에 속한다. 큰 마트도 있고, 치킨집도 있다. 게다가 '오일장'도 있다. 5일마다 열리는 5일장. 세화리 근방의 주민들은 장이 열리는 날이면, 이곳으로 모인다. 그간 필요했던 식료품을 한 번에 사는 날. 양손 가득, 무겁게 쟁여오는 날. 빨래를 널고 난 후, 온 집안 식구들은 장바구니 하나씩 들고 집을 나섰다.


<세화 오일장>은 세화리 바다 옆에 위치해있다. 바다에서 갓 잡아온 생선들이 즐비하다. 육지에선 쉽게 보지 못 했던 희한한 모양의 생선들에 수족관에 온 아이마냥 신이 났다. 다시 새댁의 마음으로 돌아와 오늘 나의 장 볼거리를 살펴본다. 계란 한 판과 반찬거리 그리고 과일. 주먹만 한 계란 한 판이 5,000원에서 6,500원으로 저렴하다. 실속 있는 주부는 지갑 사정을 살펴야 한다. 흥정을 하기도 한다. 5,000원짜리 계란 한 판을 고르고는 무심하듯 강렬하게 아양을 떨어보기도 한다.



달걀 하나만 더 얹어주세요~



아주머니는 기분이 좋으신 듯 달걀을 두 개를 덤으로 주셨다. 파는 아주머니도 사는 나도, 오일장이 재미나는 순간이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반찬 가게다. 여러 가게가 있지만, 파이샤의 추천을 따르기로 했다. 양념 가득한 젓갈을 보니 입에 침이 고여 왔다. 모두 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나의 지갑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무엇을 살지 고민하는 어린아이처럼 하염없이 반찬 앞에 서있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읽으셨던 걸까.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시던 어머니는 많이 줄 테니 아무거나 골라보라 하셨다. 이것만 있다면 밥 한 공기는 뚝딱 먹는 마법의 반찬, 오징어 젓갈과 굴젓을 샀다. 양손 가득 들고 있으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이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 


파이샤는 오일장에 올 때마다 핫도그를 사 먹는다. 그녀에게 오일장은 장 보는 것보다도 핫도그가 먼저 떠오르는 듯했다. 토마토케첩을 끝까지 죽- 바르고 나면 그녀의 입꼬리도 같이 길어진다. 아마 이런 이유로 재래시장이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 물건만을 사고파는 곳이 아닌, 사람의 마음이 오고 가는 곳. 이쯤 되면 재래시장은 '어른들의 놀이공원' 같다.


실컷 돌아다니며 일주일치 장을 보았다. 간간이 군것질거리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허기짐을 느끼는 것일까. 세화 오일장에 오면 꼭 가는 집, 보리 비빔밥에 미역국으로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핫도그 덕분일까? 밥이 참 달았다.




#선거 그리고 사전투표


나는 제주에 여행을 왔지만 온전한 '여행자'는 아니었다. 해야 하는 기본 의무와 본분을 잊지 않았기에 이틀간 진행하던 사전투표에 참여했다. 충청도에서 온 갓 20대의 학생들, 경기도에서 온 퇴사녀, 제주에서 살고 있는 부부. 가기 전, 셰어하우스에서 함께 사는 다섯 식구는 각자 해당하는 지역구 후보에 대해 알아보았다. 4년간 나의 생활 전반에 영향 끼칠 사람을 뽑는 것이니 이 정도의 수고로움은 수고도 아니었다. ... 사전투표 장소는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무표정을 한 관계자 두 명이 나를 맞아주었다.



육지에서 오셨어요? 그럼 관외 선거인 투표로 가주세요.



'육지'에서 왔냐는 저 말이 왜 이리 나를 설레게 할까. 차례를 기다리면서 곰곰이 생각해본다. 육지라는 단어가 내가 곧 '제주'라는 섬에 있다는 걸 재인식시키기 때문인 걸까. 섬에 사는 사람들에게 육지는 가기 힘든 곳이었고, 나는 그곳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나의 이런 고생스러운 여정을 인정받고 싶은 걸까. 무엇이 되었건 제주에서 듣는 '육지'라는 단어는 어감이 참 좋다. 이런 쓸데없는 상념 속을 헤매고 있을 때 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두 번째로 해보는 사전투표. 절차는 간단하다. 관계자 두 명 중 한 명이 내가 제시한 신분증을 확인하는 사이, 나는 오른손 엄지 지문을 기계에 찍는다. 다른 한 명은 해당하는 지역구 봉투와 투표지를 마련해준다. 소신 있게 투표를 하고 난 후 봉투를 준비된 함에 넣고 퇴장하면 된다. 그렇게 육지 처녀의 투표는 끝이 났다.



함께 사는 식구들과 찍은 투표 인증 사진. 특히 투표를 처음 해보는 22살의 젊은 처자는 많이 뿌듯해했더랬다. 우리는 주민자치센터를 배경 삼아 단체사진도 찍었다. 가족사진처럼 설레고도 어색한 순간. 우리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녁, 그리고 여유


오일장을 보고 난 후, 세화 앞바다 정자에 앉았다. 늘 그렇듯 우리 앞엔 제주 막걸리와 이 날의 안주, 순대가 있었다. 지난밤 누군가 물감을 풀어놓았는지 에메랄드빛 바다는 영롱했다. 아직 바닷바람은 차가웠지만 술 한 잔의 여유로 마음은 뜨거워졌다. 



별일 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식구들은 노곤 노곤한 몸을 뉘었다. 다섯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북적대던 집에 찾아온 조용한 시간. 


타닥타닥- 나의 타자 소리와 옆집 진돗개 짖는 소리만 불규칙하게 들려온다. 

하는 일 없이 바쁜 제주의 일상은 늘 새롭고 재미난다.




@YogurtRadio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