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섬에서 펼치는 육지인과의 숨바꼭질! 그녀를 찾아주세요.
먼 곳에서 친구가 온다. 그녀에게 나는 여행자가 아닌 '현지인'이었다. 맞을지도 모른다. 서울보다 강한 햇살에 어느덧 나의 손은 까맣게 변해 있었다. 덕분에 매일 끼고 다니던 반지를 끼지 않아도 하얀 선의 투명 반지가 생겼다. 세수를 끝내고 투명 반지 위에 퍼즐 맞추듯, 진짜 반지를 얹었다. 육지인 맞이 외출 준비 끝-
지난밤 제주에 손님이 왔다. 나와 인연을 맺은 지 한 달하고도 보름 남짓 되는 그녀. 록을 좋아하면서도 피아노곡에 가슴 설레는 소녀 감성을 지녔다. 코튼 원피스를 잘 소화하는 그녀는 아일랜드를 항상 가슴속에 품고 산다. 그녀를 보면 절로 북유럽풍 패턴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가 이전 직장에 입사하기 전 일주일 먼저 들어왔다. 1살 위의 언니.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 우리의 감성이 비슷함을 깨닫고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관계란 알아온 세월과는 무관한 것일까. 그녀가 퇴사하던 날, 점심 식사하면서 드문드문 서로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때 우리의 얼굴은 한없이 슬펐다.
세뇌시키듯 계속 연락하자고 서로는 다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둘의 공통분모였던 회사 이야기는 더 이상 흥미로운 대화 소재가 될 수 없었다. 꺼져가는 대화 불씨에 다른 대화 소재가 필요했다. 처음보단 대화를 나누는 빈도수가 적어지긴 했지만, 가끔씩 큰 만남이 있었다. 그녀가 이곳 머나먼 제주도에 왔듯이.
그녀는 여행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철저한 계획과 준비가 되어 있어야 안심을 했다. 그 탓에 조금 먼 거리의 여행은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간과 돈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 여행일수록 그녀가 집으로 돌아갈 때 얻은 것이 많아야 했다. 어쩌면 이번이 그녀에게 처음일지 모르는 기나긴 여행일 것이다.
그녀가 제주에 온 유일한 이유. 바로 '우도'였다. 숙소도 우도로 떠나는 배가 있는 성산항 근처로 잡았다. 그 배를 타는 날 아침,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일찍 눈이 떠졌더랬다. 성산항에서 나를 만나기로 해놓고 그녀는 먼저 우도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사실 그녀에게 나는 우도 가는 김에 보는 친구였는지도 모르겠다. 덤과 같은? 덕분에 우리의 만남은 조금 더 늦춰졌다.
나는 뒤늦게 항구에 도착했다. 배 시간에 맞춰 타기 위해 서둘렀다. 약속한 시간에서 조금 늦어진 사실이 나를 더 애타게 만들었다. 괜스레 보고 싶은 마음이 진해졌다. 배 안에는 둘셋씩 짝지어 온 사람들뿐이었다. 배를 따라오는 기러기들도 무리 지어 날아다닌다. 또 나만 혼자인가 싶을 때,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 전기 자전거 빌려서 타고 있어. 너도 빌려서 타고 와.
하, 또 어디를 간다는 걸까. 어렵게 먼 곳으로 떠난 여행이 얼만큼이나 소중한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한 곳에 있어야 만나기가 쉬운데 쉽사리 잡히지 않는 그녀였다. 나에 비해 그녀는 제주에서의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쥐어짜듯 어렵게 월차 내고 온 여행에서 기다림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문자에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우리의 다음 만남의 장소는 '우도봉'이었다. 이쯤 되니 그녀가 그리워졌다. 그전까진 딱히 별 생각이 없었는데...
우도에 도착한지 2시간 가까이 지날 무렵, 우리는 우도봉에서 극적 상봉하였다. 하루의 절반이 지나고 있었다. 그녀는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는 탓에 상봉시간이 늦어진 것이다. 찾아 헤맬 땐 짜증이 조금 나기도 했지만 짜증을 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시한부 여행을 하는 중이니까. 제주에서 보낼 날이 오늘 하루 뿐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하얀 치마를 입고서 전기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어디 흙탕물 속을 나뒹굴었는지 하얀 치마는 얼룩덜룩 만신창이였다. 체인에 묻어있던 기름이 치마 이곳저곳에 기름칠을 한 것이다. 꿈에 그리던 우도에 있어서일까? 못할 줄 알았던 여행을 하고 있어서일까? 그녀는 속상한 기색이 하나 없이 해맑았다. 우도봉에 오르려는데, 아차, 그곳에는 자전거를 세우는 공간이 없었다. 앞뒤 생각 않고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우도봉에 왔는데, 정말 만나기만 했다. 또다시 자리를 옮겨본다.
전기 자전거는 페달을 조금만 밟아주면 가속이 붙어 앞으로 나간다. 스쿠터와 자전거 중간쯤에 있는 녀석이랄까. 많은 힘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위험하지 않아 마음에 쏙 들었다. 인간은 방심하는 순간, 사고를 당하는 법. 전기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달리던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뭐랄까. 이어폰 마이크로 멋지게 통화하며 자전거를 즐기는 문명의 여자를 연출하고 싶었다. 무엇이든 적당해야 하는데 허세에 취하면 반드시 사고가 난다.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다 자전거와 함께 내 몸도 전화기도 모두 공중으로 날려버린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이 나에겐 슬로모션과 같이 느리게 보였지만 여러 생각이 빠르게 들었다. 전화기 걱정이 그중 우선이었다. (이게 돈이 얼마짜리였더라...)
운전 중 전화는 절대 받으면 안 되는 것이거늘... 손바닥과 무릎이 깨지고 발목을 절뚝거렸다. 근처를 지나던 사람이 자전거를 타면서 전화를 받으니 그렇지, 라며 핀잔을 주었다. '맞는 말이니 째려보지 말자.' 면서도 속상하고도 당황스럽고 이게 지금 무슨 일인가 싶었다. 억울하더라도 내 잘못인지라 눈물도 나지 않았다. 또 다른 젊은 행인이 멀리 나뒹구는 자전거를 세워주었다. 앞서가던 그녀는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 돌아왔다. 정말이지 더도 말고 딱! 5분만 시간을 되돌렸음 좋겠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럼 뭐해 이미 늦었는 걸.
역시나 나의 전화기는 박살 나 있었다. 완전히. 스치는 손길에 유리조각이 묻어났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어차피 바꿀 때도 됐어. 3년이면 오래 썼지. 이미 깨진 걸 어쩌겠나,라고 되뇌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란 사람은 긍정적이라 해야 할지, 단순한 사람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시 자전거 위에 올랐다. 우도 해안도로를 쉼 없이 달리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달리면서도 달릴 수 없었다. 걱정 때문에? 무릎이 아파서? 아니다. 눈앞에 펼쳐진 우도의 풍경이 내 발을 붙들었다. 예쁜 것을 보면 그걸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가진 건 깨진 전화기뿐. 그거라도 사진을 찍어본다. 그 와중에 풍경 속에 내 얼굴도 박아본다. 해맑다고 해야 할지, 그와중에 나는 활짝 웃었다.
우도는 항구가 두 군데였다. 하우목동항과 동천진동항. 그녀는 후자에서, 나는 전자에서 내렸었다. 각자 내린 곳이 다르기에 전기 자전거를 대여한 곳의 위치도 달랐다. 동천진동항의 막배 시간인 오후 3시 반쯤이 되자 그녀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쪽 항구에서는 저녁 6시까지 배가 있었지만 그녀가 자전거를 반납해야 하는 곳은 동천진동항이었다. 제대로 여행을 하긴 한 건지 어쩐 건지, 벌써 반납시간이다. 나보다 먼저 빌린 그녀는 먼저 반납을 하곤 하우목동항에서 만나자 말했다. 자전거 대여소 직원이던 젊은 청년이 그녀를 스쿠터로 하우목동항까지 태워주겠노라 말했다. 낯선 청년 허리를 감고 유유히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대체 누가 겁이 많대..? 저렇게나 과감한데.
우도는 '섬마을'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포근하다는 느낌. 그녀가 반대편 항구로 떠난 사이, 섬을 조금 더 둘러보기로 했다. 고즈넉한 동네, 먼 바다에서는 동네 할망들이 모여 물질을 했다. 나에게 이곳은 휴식처인데 저들에겐 생계고 삶이었다. 그래도 한 평생 힘들고 어려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면, 오감을 행복하게 해줄 이곳이 낫지 않을까. 이미 이곳이 현실인 그들에게는 뭇매 맞을 소리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다리를 삐진 않았지만 여전히 욱신거렸다. 긴 바지를 입은 탓에 까진 무릎을 볼 수도 없었다. 보이진 않지만 통증으로 알 수 있었다. 살갗이 까지고 살짝 피가 났으며 군데군데 피멍이 들었다. 그래도 행복하다면 이상한 여자일까. 우도의 명물, 땅콩이 듬뿍 담긴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물었다. 나의 발밑에서 한참을 자던 진돗개는 졸린 눈을 끔벅거렸다.
돌아가는 배에서는 혼자가 아니었다. 마주 보고 앉아 그녀의 더러워진 치마와 나의 깨진 전화기를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은 한참을 웃으면서도 씁쓸한 정적이 이어지기도 했다. 애틋하고도 정신없던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