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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May 21. 2019

잠시, 도망가겠습니다

물안개 속에 들어가 한 동안 나오지 않았다.

지난밤 퍼붓는다 싶을 만큼 비가 내렸다. 가만 보면 제주의 날씨는 모 아니면 도다. 잠깐 외출해도 피부가 타고 있음을 느낀다거나, 하늘에 구멍 뚫린 듯 비 쏟는 날씨. 작년 겨울엔 35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절대 애매모호함이란 없다. 어제도 그랬다. 번쩍하며 번개가 하늘을 찢고 이내 천둥소리가 제주를 가득 울렸다. 그 밤 서울에서 찾아온 또 다른 손님. 무얼 하며 그 시간들을 보냈을지 궁금해졌다. 오늘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 쨍하고 해 뜰 날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최대한 멀리 도망쳐 나온 곳, 제주도


나름 제주에 한 달 산 거주민이라고, 서울에서 온 손님에게 가이드해주겠노라 말했다. 그리곤 선언한 지 10분 만에 후회했다.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나도 아직은, 여행자라는 것을. 여전히 내게도 발길 닿는 곳마다 새로운 곳이 많았다. 그럼에도 이제 막 여행 온 사람에게 나는 '현지인'이었고, 그들은 내게 기대하는 바가 많았다. 그런 사람 앞에서 '나도 잘 모릅니다.'라고 고백하기는 쉽지 않았나 보다.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건지, 아님, 내가 정말 '현지인'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아마도 후자일 확률이 높다.



그 사람과의 인연은 7년 전인 2012년 4월부터 시작된다. 방송작가 교육원 수강 당시 같은 조 사람이었다. 6개월의 교육 후, 각자 방송국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 사람은 작가가 아닌 중계 쪽에 둥지를 틀었고, 나는 다큐멘터리 취재 작가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약 2년이 지났다. 당시 함께했던 사람들 중, 지금 필드에 남아있는 사람은 몇 없다. 열정만 가득해 뛰어들면 타 죽고 마는 불나방처럼. 방송계는 그런 곳이었다. 그중 아직 타 죽지 않은 불나방 한 마리가 제주에 온 것이다. 이 사람은 '도망 왔다'라고 말했다. 나는 굳이 그 말의 부연 설명을 듣지 않아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달 동안 휴일 없이 일하는 게 당연한 방송국. 요일이란 존재가 무색하리만큼 의미가 없고, 방송일에 맞춰 모든 시간표가 짜이는 곳. 그곳에서 그 사람은 용케 휴가를 얻어냈다. 그럼에도 불안한 그는 '도망'을 왔다. 휴가를 떠나도 누군가 이름을 부르면 돌아가야 하는 일. 휴가지 선택도 어렵지 않았다. 부르면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곳, 배 타고 비행기 타고 멀리 떠나야 하는 곳에 숨어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깊은 공감에 끄덕이면서도 안쓰러움에 볼멘소리를 했다. 그 일을 대체 언제까지 할 거냐는 의미 없는 질문. 그 사람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아주 멍청한 질문이었다는 뜻이다.


방송일은 중독성이 짙은 직업이다. 이 일은 비록 박봉이어도 그 맛에 중독된 사람들에겐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마약과도 같았다. 그 세계에 한동안 빠져 살았던 내가 결코 던질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말없이 운전했고 나는 괜히 라디오 채널을 이리저리 바꿨다. 제주에 온 지 이틀 째인 여행자와 제주에 한 달째 거주 중인 여행자가 떠나는 관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난데없이 등산


‘생각보다 제주도가 크구나’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수없이 되뇌었던 말이었다. 북쪽의 제주시와 남쪽의 서귀포시, 두 개의 시로 이루어진 특별자치도인 제주도. 내가 사는 행원리는 제주시 구좌읍에 위치해있었고, 섬의 생긴 모양 따라 버스로 2시간 30분을 쭉 따라 내려가면 서귀포시를 만날 수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다. 특히나 나 같은 뚜벅이 여행자에겐 더더욱.


나는 여행자이면서도 거주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주민을 지향하는 여행자였다. 관광에 목매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제주에 왔으니 이곳엔 가봐야지, 하는 것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럼에도 내 속엔 거주민의 마음가짐도 있어서, 여행 계획에 있어 안일한 태도로 일관했다. 

'시간도 많은데, 나중에 가지 뭐.', '오늘은 좀 흐리니 나가지 말아야겠다.' 등. 


아마 같은 이유로 한강 유람선 타보지 않은 서울 사람들이 많은 걸 테고, 매번 지나치는 63 빌딩도 안 가본 서울 토박이가 태반일 테지. 서울에서 도망 온 방송 종사자는 차를 렌탈해왔고, 나는 부랴부랴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떠올렸다. 버스로 가기에 힘든, 하지만 가고 싶었던 그런 곳. 가이드해주겠다는 말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결국 고심 끝에 사려니 숲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행원리에서 차로 30분 정도면 도착하는 터라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버스로 가려면 201번을 타고 성산 쪽으로 가서 710-1번 버스로 환승을 해야 했다. 약 1시간 40분 정도의 여정. 아, 이래서 다들 차를 렌트해오는구나 싶었다. 조금 돌아가지만 남는 게 시간이고, 한번 거쳤던 길일지라도 매 순간 다른 길이니 그것에 위안 삼으며 지냈다. 


애초에 내가 상상했던 가이드는 (나는 아직 가이드에 미련이 남았다) 여유로운 숲길 속에서 피톤치드를 가득 들이마시며 내 속의 나쁜 숨들과 교환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상대방과 지난 살아온 삶들을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것. 이 사람들이 도대체 걷고 있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분간하지 못할 만큼 차분하게 숲 속의 소리에 맞춰 가는 시간. 언제나 상상은 아름다운 것에 불과했다. 현실은 삐질삐질 흘리는 땀에 입고 있던 웃옷을 벗어 들어야 했다. 예감이 좋지 않다. 나의 가이드는, 실패하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불행 중 다행은 피톤치드도, 지난 인생을 나눈 것도 맞다는 점이다. 가빠 오는 호흡에 대화가 순조롭게 이어지진 못했지만 꽤, 괜찮은 시간이었다. 판타지 소설 속 엘프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숲 속,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사람들이 없었다. 다들 입구에서 1-2km 정도 걷다 돌아갔다. 이렇게 깊이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고 우린 '물찻오름'을 목표로 계속 걸어보기로 했다. 이렇게 다짐하던 순간, 방향 전환을 했어야 했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거의 다 왔을 무렵, 몇 등산객이 전진하지 못하고 서있었다. 자연 그대로를 보존해놓은 숲길, 중간중간 계곡물이 범람해 길 위를 흐르고 있었다. 지난밤 쏟아낸 비의 흔적일 것이다. 가로막힌 길에 사람들은 하나 둘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상상 속 시나리오에도 없었기에 당황한 우리는 '어쩌지'만 반복했다. 1km만 더 가면 물찻오름이었다.



발에 물 묻는 걸 그리 무서워해서 어째. 말리면 되지!



그런 우리를 지켜보시던 아저씨께서 가볍게 툭 던지신 말씀이었다. 맞는 말이다. 발에 묻은 물이야 말리면 그뿐이다. 그 물이 신발을 망치면 또 얼마나 망치겠는가.


- 에라, 모르겠다. 신발 벗자. 여기까지 왔는데 물찻오름 보고 가야지.


발등을 살짝 덮을 만한 물 깊이. 분명 발만 담갔는데도 온몸을 시원하게 감싸주는 계곡물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 사람은 신발 끈이 많은 신발이라 벗는데 한참이 걸렸다. 그에게 약간, 아주 약간 미안하긴 했지만 그 사람에게도 좋은 추억이 됐으리라 생각된다. 그렇게 다시 신발을 신고 걷는데, 500m 앞 이전보다 더 큰 웅덩이를 발견했다. 발등에서 끝나지 않을 물 깊이. 그래도 더 이상 무서울 것은 없었다. 우리는 이미 발이 젖었으니까. 




#무진기행을 떠나다


물찻오름까지 도착했지만 '물찻오름'은 볼 수 없었다. 자연휴식년제를 2018년 6월까지 진행하기 때문이었다. (이 여행기는 2016년에 작성된 글입니다) 사전조사 없이 무작정 올랐던 터라 물찻오름에서 허망함을 느꼈다. 가이드를 시켜달라니 등산을 시키냐며 툴툴 거리는 그 사람을 달래느라 애를 좀 먹긴 했지만, 아무렴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숲길을 거쳐 빠져나오니 거대한 호수가 보이던 그곳이 떠오르기도 했다. 여행은 동행자와 함께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오로지 내 몫인 건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얻어 가고 느끼는가. '



돌아가는 길, 자욱한 물안개를 만났다. 한때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을 즐겨 읽었다. 이유는 안갯속에서 시작하는 도입부 때문이다. 우리네 인생처럼 한 치 앞도 모르는 그 길 안에서 막연감에 두려움보단 자유로움을 느꼈다. 저 멀리서도 내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차에서 내려 안갯속에 들어가 한동안 빠져나오지 않았다.

(※ 위험하니 따라 하지 마세요!)



@YogurtRa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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