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맛있는 밥이라도 매일 먹으면 질리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제주 구좌읍에 위치한 행원에 자릴 잡았기에 여행도 동쪽으로 가기가 쉬웠다. 처음엔 동쪽의 모든 풍경이 새로워 반짝였더랬다. 서서히 그 빛깔이 눈에 익으니 어느덧 권태로움이 문턱까지 찾아왔다. 아무리 맛있는 밥이라도 매일 먹으면 질리기 마련. 나는 앞으로도 그 맛있는 밥을 계속 맛있게 먹고 싶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먼 길을 떠나보려 한다. 그 첫 시작점은 제주 서쪽의 애월리다.
뚜벅이(도보 여행자)의 여행은 생각보다 무척 부지런해야 한다. 쉼 없이 걸을 것을 감수해야 하고, 두세 번의 버스 환승에 힘겨워하면 안 되거니와 이 모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목적지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인내해야만 한다. 제주 동부에 위치한 행원리에서 서쪽에 있는 애월리를 찾아간다는 것은 한라산 등반만큼이나 큰 결심을 하고 가야 하는 여정이었다. 사실 그래서 서쪽에 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볼까 싶다가도 지도를 보는 순간 한 번, 2-3번의 환승노선을 확인하는 순간 또 한 번, 다시 동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으니까.
‘그래도 가보자.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텐데.’
행원리에서 제주 터미널 가는 701번 시외버스(현재는 201번으로 바뀌었다)를 탔다. 두 달여간 제주도에 살다 보니 눈에 익은 기사님도 더러 보이는 경지에 이르렀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할 뻔했다면 과장일까. 이날도 역시나처럼 맨 앞자리에 앉아 괜히 기사님을 힐끔거렸다. 기사님은 나 기억 안 나요? 속으로 이와 같은 말을 되뇌면서. 이내 나만의 마음으로 접어두기로 했다. 야구는 9회 말 투아웃 상황에서 진짜 게임이 시작되고, 모든 상황이 마무리된 드라마에서도 마지막 반전이 있듯, 실제 인생도 그랬다.
행원 아가씨! 이거 먹어.
기사님은 날 기억하고 계셨다. 그때도 이렇게 애타게 날 부르셨다. 몇 주전 서귀포에서 행원리로 돌아오던 날 밤, 기사님께서는 멈춰 선 신호 틈을 타 나의 손에 커피 껌을 쥐여주셨었다. 이번에 주신 건 박하사탕 두 개. 애월 가는 머나먼 길이 순식간에 달콤해졌다.
버스 전면 유리창을 빠르게 스치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그렇게 해안도로를 따라 1시간 정도를 달렸다. 이젠 이 정도의 거리가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시골 중에 시골인 행원리 같은 곳에서 살기 위해선 이것에 길들여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터미널에서 서쪽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버스로 몸을 옮겼다. 702번 버스(202번 버스로 바뀌었습니다)다.
눈부신 오후, 찬란한 햇살을 온몸으로 호흡했다. 동쪽과 어떻게 다른지, 이곳의 공기는 어떤 냄새를 품고 있는지, 바다색은 얼마나 깊은 파란빛인지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모든 것을 분석하기에 바빴다. 사실 특별히 정해둔 목적지가 없었기에 정처 없이 발길 닿는 대로 흐느적거렸다. 그곳이 초행길이라면 그곳의 가장 유명한 곳을 방문하는 게 제일 쉽다. 아무래도 실패할 확률이 낮을 테니까. 나 또한 그 명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애월리에서 어떤 관광지보다 유명하다는 <봄날 카페>를 가보기로 했다.
2015년에 방영한 MBC 드라마 <맨도롱 또똣> 촬영지, 봄날 카페. 맨도롱 또똣이란 제주 방언으로 '부드럽고 따뜻한'이라는 뜻으로 왜 이곳을 촬영지로 선택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깊이에 따라 다른 빛을 구현하는 애월리 바다와 바로 옆, 따뜻한 색감을 품고 있는 카페까지. 맨도롱 또똣, 그 자체였다.
사실, 카페를 들어가지는 않았다. 제주 관광지도에 '꼭 가봐야 하는 관광지'로 표시되어 있는 건지 어쩐 건지 - 나중에 확인하니, 실제로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 국적을 막론하고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애월리에서 딱히 어떤 계획이 없었던 나는 책이나 읽다 돌아가려 했는데, 그곳은 '그런' 것과는 너무나도 먼 곳이었다. 세화 오일장보다도 더한, 그곳은 한마디로 도떼기시장이었다. 그곳은 더 이상 카페라고 불리기엔 민망해 보였고, 관광지가 조금 더 맞는 말 같았다.
- 주문을 하셔야 입장이 가능합니다.
그때 주인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외치는 말이 들렸다. 관광지를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하듯, 이곳을 들어가려면 커피값을 내야 한다는 건가. 그럼 커피값은 입장료가 되려나. 점차 내 안에서 커져가는 회의감을 어쩌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앞에서 사진 찍기 바빴다. 완전히 돌아서기 전, 투덜거리면서도 이곳까지 온 고생이 아깝다며 카메라를 들이미는 나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아쉬웠는지 목을 잔뜩 늘려 내부를 들여다본 후, 빠르게 합리화를 해본다. 들어가봤자 별게 없다고.
정착하려 했던 곳이 실패가 된 뒤, 약간의 방황을 했다. 다음 목적지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첫 번째에서 온 실망 탓에 더 이상 애월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진 것이었다. 사실 이 모든 건 핑계에 불과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행원으로 돌아와 파이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니, 그녀는 내가 동쪽에 먼저 정을 준 탓이라고 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어머니의 마음이랄까, 내 아들이 제일 멋지다고 인정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쪽은 멋지지 않다. 내가 머문 동쪽이 최고의 선택이었다"라고 무의식에서 외치고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맞는 말 같다. 나는 이후로도 서쪽에 어떠한 감흥도 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행원리를 배신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