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세 사람은 동거인이자 가족이 되어 있었다.
함께 지낸 시간을 세어보았다.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오래되지 않은 날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래전부터 함께한 사이 같았다. 비슷한 취향, 성향, 성격 등 각종 갖다 붙일 수 있는 조건들이 맞아떨어졌다. 어쩌면 나는 이곳, 행원리에 오기 전부터 그녀를 이미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뒷마당에서 키우는 루콜라.
주인 부부가 집을 비운 지 4개월이 지났어도 이것들은 알아서 잘 자라고 있었다. 잘 자라다 못해 중구난방으로 잎사귀가 나 있었다. 역시 집주인은 집주인이었다. 오랫동안 집을 비웠대도 그릇을 찾는 손길이 친숙했다. 동선이 자연스럽고 효율적이다. 파이샤는 루콜라 잎사귀로 금세 샐러드를 만들어왔다. 나 혼자 살던 열흘 동안만큼은 이 집은 나의 집이었다. 나의 체취, 부엌 테이블에 놓인 텀블러와 식빵, 화장실에는 젖은 수건과 칫솔... 나의 흔적이 가득했더랬다.
그런 집에 나 이외에 사람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혼자 살 때는 느끼지 못 했던 것들. 버터 바른 식빵이 노릇해지는 냄새 위에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레몬 진저 향이 함께 났다. 이들 부부가 자식처럼 키우는 강아지 영희도 오랜만에 느끼는 안정감에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열흘간 이 집주인처럼 활보하던 나의 자신감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다시 나는 쭈구리가 되었다. 머물 곳 모르는 시선과 정의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이 나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다시 발을 모으고 코타츠에 둘러앉았다.
주인 여자는 나에게 항상 소파에 기대앉을 수 있는 상석을 내주었다. 작은 호의지만 나를 향한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나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말이 많지 않은 편이다. 상대를 관찰 혹은 파악하는 시간. 주인 남자는 줄곧 조용했고, 반대로 여자는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 여자의 재잘거림은 본성이 아니라, 어색한 침묵을 타개하려는 그녀의 노력이었다. 이를 알아챈 지는 그로부터 30분 정도 지켜본 뒤였다.
어느 정도의 알코올에 긴장의 끈이 느슨해졌다. 차가웠던 공기가 따뜻해지고 세 사람의 양볼도 뜨거워졌을 무렵, 주인 여자는 내게 대뜸 고백을 했다.
나, 얘가 좋아!
남녀 관계가 되었건, 친구가 되었건 사람을 알아갈 때 주로 하는 질문은 '영화, 음악 취향'이다. 대화를 이어나가기에 이만한 소재가 없으니까.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나를 이루는 감성과 생각을 소개하기에 이만한 이야기는 없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영화 하나를 더 댈 때마다 주고받는 말들의 간격은 좁아졌다. 주인 남자도 조금씩 긴장이 풀리는 듯, 웃음을 자주 보였다. 웃음소리가 잦아질수록 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는 아침.
제주 행원리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늘 그랬다는 듯, 주인 여자 파이샤는 나에게 뒷마당으로 나오라고 했다. 눈곱도 떼기 전인데, 뒷마당엔 무슨 일일까 싶었다.
주인 남자, 루피가 만든 간이 평상. '간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미안할 만큼 튼튼하고 목재가 좋았다. 주인 여자, 파이샤는 이 날 해야 할 일을 남편에게 말했다. 파이샤가 한 가지씩 읊었고, 남편 루피는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들었다. 나는 그저 청취자일 뿐, 지역 라디오 공개방송에 온 것 같았다.
파이샤는 차를 한껏 우리더니 잔에 따랐다. 사기그릇에 떨어지는 찻물 소리가 바람에 어우러졌다. 우리 셋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점점 진해지는 차 색깔을 들여다 보다가 고개를 들면 옆집 초록 밭이 보였다. 무슨 밭일까 궁금해 물어봤다. 당근밭이라고 했다. 곧 주황 작물이 열릴 걸 상상하니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렇게 별일없이,
오전이 흘러 머리 위에 해가 떴다.
파이샤는 저녁때가 되면 나에게 식사 여부를 물었다. 식사를 제때 챙겨 먹지 않는 나를 위한 마음 씀씀이었다.간혹 나의 대답이 시원치 않기라도 하면, 그들 식탁에는 언제나 밥그릇이 하나 더 놓여있었다. 내 것이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얼른 치킨너겟을 튀겨 반찬에 보탰다. 내가 내올 수 있는 반찬이 고작 치킨너겟이라니. 혼자 살 때 나에게 식사는 '일'이었다. 간편하고도 빠르게 생존이 가능할 정도로 먹는 일.
명이나물, 계란말이, 그리고 치킨 너겟.
루피가 끓인 시원한 돌미나리 된장국까지 있으니 저녁 상차림이 화려해졌다. 그리고 빠지지 않는 것 하나, 술. TV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를 보면서 하루살이가 별것 없구나, 하루 세끼 챙겨 먹으면서 저렇게 행복해하는구나 싶었는데. 이곳에 와 시골살이를 해보니 언젠가부터 서울살이 하던 내가 어색해졌다.
밥그릇 부딪치는 소리, 국물 마시는 소리.
이것은 사람 사는 소리였다. 가족이 낼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소리. 나는 명이나물을 좋아했고, 자기들끼리 들러붙은 명이나물을 떼려고 고군분투했다. 파이샤는 밥을 뜨다 말고 젓가락으로 명이나물을 떼주었다. 누구도 먼저 부탁하지 않았고, 도와주겠노라 말하지 않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뤄진 관계였다. 혼자 식사할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함과 충만함.
어느새 세 사람은 동거인이자 가족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