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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Apr 16. 2019

아픔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 다섯 명이 합심하여 그려낸 그림엔 어떤 다짐들이 있었다.

AM 9:00

초침 소리가 다시 선명해졌다. 다시 아침이다. 몸은 깨어났으나 여전히 이 집에는 밤의 기운이 가득했다. 먼지 한 올 일지 않을 만큼 차분한 방안. 어디선가 바람이 들었다. 문틈으로, 창호지 사이로, 그릇들을 훑고는 또 신발 속을 들락날락한다. 이곳에 구멍이 있었나 싶게 바람은 곳곳의 빈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내 비가 서럽게 내리기 시작했다. 다시 찾아온 그날의 아침이다. 






하나둘 꽃 피우는 계절, 4월의 봄날. 아직 찬기운이 가득한 듯 한결 따스한 바람에 어젯밤 꽃망울이 일제히 터졌다. 세상 빛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여리디 여린 잎사귀들. 연두빛깔이 그들의 싱그러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소리치는 304개의 빗방울. 못다 핀 꽃들이 두들긴 유리창엔 슬픔만이 가득하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들. 초록 밭을 배경에 비친 그들은 일그러져 보였다. 여태껏 간신히 버티고 있던 꽃잎들 마저 휘몰아치는 바람에 처참히 짓밟혔다. 


공감. 상대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 내가 너일 수 없고, 네가 나일 수 없듯 애석하게도 누군가의 아픔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상처를 쉽게 재단하지 않는다. 나의 오만함이 타인의 상처를 더욱 후벼 파는 행위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상처가 났다. 걷다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살짝 까진 무르팍에 마음도 몸도 쓰라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딱지가 입고 새살이 돋는다. 새살이 난 자리에 하얀 자국이 남았다. 또 다른 시간이 흐른다. 언제 상처가 났었냐는 듯 오래된 살과 뒤섞인다.


여기 잊을 수 없는 아픔이 있다. 혹자는 그만 잊으라고도 말한다. 이미 지난 일 아니냐고 다그치면서. 이제 와서 뭘 어쩌자는 거냐고 따져 묻는다. 다른 아픔들도 많은데 왜 여기에만 유난히 목을 매냐고. 여타의 것에도 관심을 가져보라고도 주장한다. 합리적이고도 논리적임을 가장해 행하는 가학 행위. 아픔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아픔에서 파생된 주변의 이기에 외면할 수는 있을지라도.


또 어떤 상처가 났다. 어디서 어떻게 다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보이지 않는 돌부리가 많이 무서웠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실낱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방. 진정한 공포는 그런 것이다. 나에게 해를 끼칠 대상의 정체가 어떤 형체인지 모른다는 것. 어느 방향에서 언제 다가올지 모른다. 하릴없이 동공만 어둠을 헤맬 뿐이다. 심장 박동의 간격이 잦아들 때 나는 짓밟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왕이면 다치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미 아플 대로 아프다. 아픔의 크기를 감히 상상하지 못해 그저 눈을 감아버린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소원을 빌어본다. 그놈의 매정한 돌부리를 걷어내 주기를. 홀로 차갑게 떠도는 마음을 감싸 안아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어느 누구라도.



어느덧 이 집엔 다섯 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한데 모여 앉아 멍하니 비 오는 창밖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지 않았지만 머리 위로 많은 말들이 떠다니는 듯 보였다. 파이샤는 책더미 속에 묻혀있던 물감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녀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맞다. 기억하는 일. 너의 아픔을 잊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덜 외롭지 않을까. 내가 이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유리창. 그 크나큰 투명 도화지 앞에서 붓을 고쳐 쥐기를 반복했다. 투박한 그림 솜씨지만 붓을 쥔 손아귀엔 분명 떨림이 들어있었다. 어느샌가 들려온 노랫말이 입가에 맴돌았다.



굿바이 얄리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까
굿바이 얄리 너의 조그만 무덤가엔 
올해도 꽃은 피는지

넥스트, <날아라 병아리>

    

우리 다섯 명이 합심하여 그려낸 그림엔 어떤 다짐들이 있었다. 알게 된 지 일주일 남짓 되는 동생이 그린 노란 리본. 그 아래에는 약속한 듯 내가 그려낸 그날의 파도, 그리고 파이샤의 빗방울이 너울댔다. 


누군가의 아픈 맘을 토닥여주길, 

간절히, 두 손 모아 가득히.




@YogurtRa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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