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renity Aug 23. 2021

불안 그리고 □를 공부하는 시간

#the record of vanity

20대 초반, 토익학원을 가기 위해 강남을 처음 혼자 갔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항상 친구들과 다녔었는데, 혼자 가려니 전날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 집 앞에서 강남역까지 한 번에 가는 광역버스가 있었음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몇 분 단위로 버스 어플을 확인하고, 지도를 보며 강남역 주변 지리를 익히고 또 익혔다. 첫 등원을 하고 며칠 동안 오고 가는 길이 익숙해지니 나중엔 늦잠까지 잘 만큼 여유까지 찾았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스스로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 내 인생에서 20대 이후 처음으로 마주한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두 번째는 미국 교환학생을 준비하던 때이다.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미국을 떠나기 직전에는 불안증을 진단받고 수면유도제와 안정제를 복용해야 했다. 심지어 가족들과 교환학생을 포기하는 것도 상의를 했지만, 그래도 한 번 시작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은 봐야 하는 성격이었기에 울면서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어이없는 것은, 몇 달 동안 약 없이는 잠들지 못했어서 약도 두둑이 챙겨갔는데, 미국 땅을 밟은 첫날부터 약 없이도 깊은 꿀잠을 잤고, 교환학생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약을 다시 복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음식이나 문화도 너무 잘 맞아서 6개월 후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부모님이 공항에서 자식을 잘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살을 넉넉히 비축해 왔다. (+11kg)


지금에서야 당시 느꼈던 그 감정들이 새로운 곳에 대한 낯섦으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이었음을 이해하지만,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막 돌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스스로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텅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불안증이라는 감정적 파도를 경험하고 나니, 그동안 스스로 억눌렀던 감정들을 돌이켜보고 이해하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더 이상 감정에 쉽게 흔들리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와 '나의 감정'에 대해서 정말 많이 생각했다. 심리학뿐만 아니라 에세이, 인문학 책을 종종 읽으며 사색하는 시간을 가졌고, 부끄럽고 감추고 싶던 감정들과 기억들을 글로 써 내려갔다. 그렇게 '나'와 '내'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갔다. 놀라운 것은, 비록 시간은 좀 걸렸지만 글을 쓰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낯선 모습도 볼 수 있었고, 억눌러 왔던 감정들을 좀 더 솔직하게 나열하고, 또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글쓰기를 통해 '타고난 나'는 불안과 우울감이 매우 높은 기질을 가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반대로, '또 다른 나'는 불안이라는 것은 나약한 사람들이나 느끼는 것이라 치부하고, 불안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고 외면해왔다는 것 또한 깨달았는데, 이는 항상 새로운 도전을 즐기고 때론 긴장마저 흥분으로 승화시키는 학창 시절에 꿈꿨던 우상의 모습을 스스로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이 '또 다른 나'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학창 시절 누구보다 당돌한 학생이었고, 도전을 기꺼이 즐길 줄 안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불안'이라는 감정이 인생에 문제가 될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교환학생을 떠나기 직전 예민했던 때를 떠올려 보면, 불안이 내 안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 그 이유를 찾고자 애를 썼기 때문에, 진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의 마찰과 감정소비만 더 커졌던 것 같다. 다행히도 스스로 불안과 우울 기재가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 후부터는 감정을 조절하고 소화시키는데 조금 더 수월해졌다.


물론 서른 살이 넘은 지금도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낯선 곳, 낯선 일, 낯선 환경들 때문에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에 휩쓸릴 때가 있다. 그리고 생각이 꼬리를 무는 어떤 날은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남아있는 인생조차 낯설게 느껴져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래도 이제는 이 불안이 어디서 오는지 금방 찾을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고 있다.


청소년 시절 또는 20대 때, 해야 하는 공부가 너무 많다. 수능공부, 역사공부, 경제공부, 취업공부, 인생공부... 모두 중요하고 필요한 공부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인생을 끝까지 함께 살아갈 '나를 공부하는 시간'을 먼저 가져야, 그래야 덜 흔들리고, 흔들려도 적어도 뿌리는 뽑히지 않는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정리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누구나 사랑을 원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