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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베티 May 18. 2021

묵계默契

그 날은 화창했다. 눈 녹은 시골길은 질퍽해서 아무리 조심해도 진흙이 묻었다. 양복을 차려입은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 사촌들, 많은 친척들이 구두신고 진창 피하기 놀이를 하듯 한 줄로 서서 걸었다. 대가족 소풍 같은 풍경이었다.

“캐리라는 여자애가 있었어. 고등학생인데, 친구들이 이 여자애를 놀리는 거야. 그런데 이 여자애는 돼지피를 뒤집어쓰면 엄청난 초능력이 나오거든. 눈짓만으로 엄청나게 무거운 물건도 들어올릴 수가 있어. 그렇게 초능력으로 자기를 괴롭히던 친구들에게도 복수를 하는 얘기야!”

사촌은 얼마 전 봤다는 영화 <캐리>의 줄거리를 들려주었다. 8살이던 나는 청소년관람불가였던 그 영화를 볼 수 없었기에 오로지 상상력만으로 캐리를 머릿속에 그렸다. <캐리>가 한국에 개봉한 것은 1978년인데 사촌은 1980년인 그 날 왜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 모르겠다. 그 날의 연도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캐리의 이야기를 듣던 그 날, 아빠의 장례식에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의 나 역시 지금의 내 딸처럼 깍두기 공책에 열심히 일기를 쓰고 있었다. 장례식을 다녀온 날의 일기장에 ‘나는 눈물을 1방울도 흘리지 않았다.’라고 꾹꾹 눌러썼다. 스스로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울면 선물을 주지 않겠다는 산타할아버지의 가소로운 협박 때문이 아니었다. 죽음이 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린이가 ‘사랑’,‘증오’,‘행복’,‘질투’와 같은 추상적인 단어를 배울때는 시간이 걸린다. 한번 심어진 단어의 씨앗은 아이의 인생을 자양분 삼아 조금씩 자라난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단어는 다르다. 씨앗을 심을 겨를이 없이 단박에 직관적으로 자라난다. 그날 내 안에서 아빠의 죽음은 캐리라는 공포영화와 함께 심어졌다.



아빠가 돌아가신 일요일은 눈이 내 키만큼 왔었다. 우리는 아침 예배에 참석하려는 아빠 때문에 시골 외갓댁에서 새벽부터 출발시켰다. 차를 타면 항상 조수석의 아빠 무릎이 내 자리였다. 에어백은커녕 안전 벨트도 매지 않던 시절이었다. 차가 시내를 접어 들어 갈 무렵 갑자기 아빠는 나를 뒷좌석으로 보냈다. 뒷좌석에는 이미 나의 외종사촌들과 이모, 엄마가 타고 있어서 자리가 없었다. 새삼스레 아이를 왜 뒤로 보내냐는 엄마의 타박이 이어졌다. 엄마의 무릎에 앉고 나서 몇 분이나 지났을까. 사거리를 돌 무렵 대형 트럭이 우리 차와 부딪쳤다. 뒷좌석에서는 느끼지도 못 할 만큼 가벼운 접촉사고였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아빠가 문을 열고 나가는 게 보였다. ‘아빠가 사고 난 걸 보려고 나가는 걸까?’ 아빠의 몸짓은 여유로워 보였다. ‘아빠 어디 가는 거야?’라고 물어봤다면 뒤를 돌아보고 웃으며 ‘괜찮아, 금방 갔다올게’라고 대답해주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아빠는 그대로 문밖으로 튕겨 나가 머리를 바닥에 부딪쳤다.



눈길이라 앰뷸런스가 늦게 왔고 일요일이라 병원에는 수련의들밖에 없어 뇌수술을 할 수 없이 시간이 지체되었다. 죽음 냄새가 풍기는 병원을 피해 이모는 나를 어수선한 시골 장터로 데려갔다. 시골식당이 싫었던 나는 국밥 몇 숟갈을 뜨다가 말았다.

”이모, 우리 사고난 거 티비에도 나왔겠지? 영동식구들도 우리 사고 난 거 티비에서 봤을까? “

그때 내 관심사는 티비에 우리 사고현장이 나왔을까. 일주일 남은 내 생일에 아빠가 무얼 사줄까 뿐이었다. 병실에서 신을 엄마 슬리퍼를 사서 검은 봉지에 담아 들고 병원으로 들어오는데, 하얀 천을 덮은 누군가의 침대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아빠였는지 아니였는지는 모르겠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아빠가 죽었다면서 통곡했다.



그 날 엄마는 분명 아빠가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아빠가 외국에 나가 있다고 하라고 했다.

“엄마, 아빠는 진짜 외국에 간 거야? 언제 돌아오는데?‘

엄마는 말만 그렇게 하는 거라며 거짓말을 이해 못 하는 어린 자식이 답답한지 길게 한숨을 쉬곤 했다. 애들이 아빠 없다는 걸 알면 놀릴 수도 있다고 했다. 사실 나는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는 것보다 거짓말을 하는 게 더 고통스러웠다. 어떤 날은 또 아빠가 진짜 외국에 간 것이라고도 했고 다음날은 아니라고도 했다. 이쯤 되자 정말 아빠가 외국에 간 것인데 엄마가 숨기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빠, 우리 새엄마 들이면 안돼?“라는 맹랑한 말을 할 정도로 아빠와 사이가 좋았으니 그것을 시샘한 엄마가 거짓말을 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빠에 대한 어떤 것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죽음에 관한 것은 물론이고 기뻤던 추억이건, 슬펐던 추억이건, 영동집에 관해서건, 어떤 질문도, 대답도 아빠와 관련된건 허용되지 않았다. 아빠를 묻은 곳은 아빠의 고향인 ’묵계‘라는 곳이었는데, 말 그대로 묵계默契에 잠들게 되었다.

30도 채 안 된 엄마에게 아빠의 죽음이 다가오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아빠의 임종을 지키면서 엄마는 아빠네 식구들에게 비난받을 생각에 겁부터 났다고 했다. 그날 운전대를 잡고 있었던 것이 외삼촌이었고, 외가 식구들을 잔뜩 태우고 외갓댁에 다녀오는 길이었고, 구태여 일요일 예배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토요일에 친정에 다녀오겠다고 무리수를 둔 것만으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실상은 더 가혹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태원의 낡은 집 명의를 엄마 앞으로 돌려준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아빠네 식구들은 유산을 노린 사고를 의심했다. 차에 탄 모든 사람들이 멀쩡했고 심지어 늘 아빠 앉던 내가 그날따라 뒷좌석에 앉아 있었던 것으로 심증은 굳어졌다. 결국 엄마는 유산 포기, 친자 권한포기까지 하고 나서야 영동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너무 억울해서 영동집에 가스를 터트려서 불을 질러버리고 나도 너를 데리고 죽어버릴 생각이었지. 그런데 그럴 때마다 네가 한 말이 생각나더라.“

엄마가 아빠가 막 돌아가시고 나서 나를 붙잡고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사냐고 흐느꼈다. 그때 나는 아이답지 않게 아주 침착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엄마. 아빠가 나 대학갈 때 쓰라고 새마을 금고에 100만원 넣어둔 거 있어. 우리 그걸로 살면 돼.“

백 원, 이 백원도 제대로 셈하지 못했던 내가 100만원의 가치를 알리 없었다. 다만 아빠가 엄마도 모르는 돈을 내게만 알려주었다는 건 그 만큼 큰돈일것이라 막연히 짐작할 만한 나이였다. 어떻게 사느냐는 말을 경제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또래답지 않았다. 물론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것도 살 궁리를 하는데 내가 그러면 안 되지 싶어서 그 말이 생각 날때면 정신이 번쩍 들었어.“

결국 그 돈은 새마을 금고가 파산이 나는 바람에 몇 십만원밖에 건지지 못했지만 여러 목숨 살리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했다.




내게 아빠의 죽음은 다른 의미의 혼란이었다. 아빠의 죽음으로 2층 양옥집 부잣집 외동딸에서 판자촌의 단칸방으로 밀려나 열 명 남짓한 이모, 삼촌들과 한방을 쓰면서 살아야 했다. <소공녀>에서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인형 에밀리만 간신히 챙겨 나온 세라 같았다. 버릇없는 응석받이 노릇은 끝이 나고, 눈치를 보는 철든 어린이 역할이 시작되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소공녀>의 결말이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라를 민친 여학교에서 구해준건 옆집 아저씨가 아니라 아빠여야 했다. 아빠 대신 재산만 돌아온 결말이 해피엔딩일 리 없었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면 혹시나 결말이 바뀌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랬지만 마지막 장에 이르르면 역시나 결말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에 낙담했다. 때로는 내 멋대로 아빠가 다시 돌아오는 결말을 지어보기도 했다. 어린아이들에게 이 결말이 잔인하다고 생각했던 건 나만이 아니었던 지, 맘씨 좋은 어떤 영화제작자가 <소공녀> 애니매이션 버전에서 아빠가 살아 돌아오는 것으로 결말을 바꾼 적이 있었다. 우연히 그 만화를 보게 된 나는 그토록 바라던 결말이었는데도 어쩐지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저건 가짜야.‘

결말을 바꿔봤자 세라의 아빠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마음에 들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다. 간절히 원해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고 아이라 해도 봐주지 않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이게 <소공녀>의 교훈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내가 <캐리>를 보기까지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사촌의 말과 달리 캐리는 돼지피를 뒤집어 써서 초능력이 생긴 것이 아니었다. 졸업파티 때 캐리를 망신주려는 친구들이 일부러 돼지피를 씌웠고 그녀의 잠재된 분노와 초능력이 폭발했던 것이다. 사촌이 영화를 잘 못 이해했거나, 내가 잘 못 이해했을 수도 있다. 사실을 확인하기에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다. 기억만큼이나 낡은 화면 속, 돼지피와 엉킨 사춘기 소녀는, 어린 내가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바로 죽음이라는 공포였다. 영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안도감과 슬픔이 느껴졌다.



종종 어른이 ”아빠!“하고 목청높여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른에게도 아빠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한편으로 여전히 마음 놓고 ’아빠‘를 부를 수 있는 내 딸을 보면 나는 위로 받는다. 나는 불러보지 못한 9살의 ’아빠‘소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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