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박8일 무계획 모터사이클 여행
곧 해가 질 시간이지만 이날 바이크 렌탈샵이 닫는 저녁 7시까지 반납을 해야하기 때문에 최대한 남김없이 라이딩하기 위해 다음 목표지를 찾았다. 카페에서 주문한 타르트는 5분도 안돼 모두 빈껍데기만 남았다. 커피도 호로록 몇 번 하니 없어졌다. 나는 이래서 카페를 잘 가지 않는다. 여유있게 앉아서 사색하는 것은 차라리 집에 있을 때나 가능하지 카페에서는 왠지 주변이 신경쓰인다.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고 느낀다. 나만 그런가?
아무튼 그저 시간이 아까워 선택한 곳은 바로 오키나와 하면 가장 많이 찾게 되는 만자모였다. 만자모는 해안 절벽 위에 조성된 넓은 풀밭인데, 평평한 평상같아서 거기 만명은 족히 앉을 수 있다는 의미라고 들었던 것 같다. 만자모는 생각했던대로 이미 완전히 관광지화 되어있어 내가 가장 기피하는 종류의 명소다. 게다가 입장료를 100엔 받았는데, 만자모 위에 올라보는 것도 아니고 먼 발치에서 구경하고 사진 한장 찍을 수 있는 게 전부였다.
대강 한바퀴 걸어다닌 뒤 슬슬 렌탈샵으로 출발할 시간이 됐다. 예정된 반납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할 것 같지만 반납시간이 샵 클로징 시간이라 좀 서둘렀다. 반납은 간단하게 이뤄졌고 바이크에 이상이 생겼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 후 자유의 몸이 됐다. 며칠간 참 알차게 잘 타고 다녔다. 애초에 빌리려고 했던 바이크보다 가격이 저렴했던 관계로 약간의 환불도 받았다.
반납하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아내가 전화를 한다. 참고로 내가 기간제로 가입한 요금제가 로밍 전화는 무료였기 때문에 자유롭게 전화를 걸고 받을 수 있었다. 데이터는 한정이지만 넉넉한 6기가 정도 됐다. 호텔이나 공공장소는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로써도 충분했다. 수화기 너머의 아내는 나의 면허증을 발급하러 돌아다니느라 회사의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했으니 선물이라도 좀 사오라는 것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만도 해서 알았다고 답하고 뭘 사가야 할지 궁리했다. 아내가 다니는 회사의 직원은 전부 청/중년의 남자들이다. 40대 전후라서 사실상 혼자사는 아저씨들이 뭘 좋아하는지 떠올렸더니 간단히 답이 나왔다. 술과 안주다.
하지만 술은 머릿수대로 사가기에는 너무 무겁고 가격도 만만찮기에 오키나와 냄새가 나는 안주가 뭔가 없을까 하다가 건어물 점에 들려 독특한 마른 안주거리를 여러개 샀다. 납작해서 캐리어 가방에 수납하기도 간편했다. 뭐니뭐니해도 선물은 먹을 것이 가장 속편하다. 일일이 사람 취향을 맞추기 어려우니 실패확률이 적은 것으로 통일하는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바이크를 신나게 타고 반납, 선물 사느라 쇼핑센터를 돌아다녔더니 이제 쉬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원래 나는 쇼핑을 즐기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고 목적을 달성하면 바로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성격이라 북적대는 나하플레이스를 서둘러 빠져나왔다. 숙소에 들러 라이딩기어를 편한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고 언제나 그랬듯, 동네 이자카야에 가서 오늘은 마지막이니 많이 먹어야지 하는 심정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제 이곳도 나름 주변 풍경이 적응돼 남의 동네 같지 않게 느껴졌다. 종종 마주치던 동네 고양이는 항상 있던 자리에 없어서 좀 서운했다.
이자카야에서 어김없이 오리온 생맥주(오리온은 오키나와가 고향인 맥주다)를 시켰다. 며칠 있다보니 나도 모르게 일본어로 주문했다.
"스미마셍! 오리온 나마비루 오네가이시마쓰"
"하이!"
알아들은 듯해서 뿌듯해 하는 사이 금새 차디찬 맥주가 앞에 놓였다. 덥썩 손잡이를 쥐고 고개를 젖히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찰나 일주일간의 여정이 샤샥하고 정수리 위로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이미 감상모드로 바뀌었나보다.
이날은 안주도 기본 300엔에서 번외인 고급 메뉴 400엔짜리들만 시켰다. 나름의 플렉스였다. 소고기 스테이크나 좀 독특하다 싶은 고기류는 접시당 400엔이다. 고기는 보통 3점에서 4점 정도 나온다. 얼근하게 먹고 마신 나는 친구에게, 아내에게 전화도 걸어가며 잠시 여유를 부렸다. 시원섭섭함에 말이 많아졌다. 아저씨니까 어쩔 수 없다. 누가보면 오토바이로 해외여행을 하는 멋진 인생을 사는 총각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난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취미를 가진 보통 유부남 아저씨일 뿐이다. 아직 여행을 마치기도 전에 벌써 출근을 생각해야 하는 직장인이다.
참고로 이 맘에드는 이자카야의 한 가지 귀찮은 점은 현찰만 받는 가게라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먹기 위해 편의점에서 ATM으로 현찰을 뽑아썼다. 신용카드로도 가능해 급할 때 써먹을 수 있다.
이튿날, 호텔을 말끔히 정리하고 체크아웃하니 딱 비행기 시간이 맞았다. 나하 공항에 이제 막 도착한 붕뜬 표정의 사람들을 스쳐지나가며 뭔가 쌉싸름한 기분을 맛본다. 난 이제 일상으로 돌아간다. 올떄와 달리 한결 차분한 마음으로 오키나와발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멀어져가는 수평선을 보며 촉촉한 눈인사를 하며 금방 또 올 수 있기를 바랬다.
인천 공항을 나서자마자 에어컨을 강으로 틀어놓은 듯한 칼바람을 온몸에 맞으니 금새 현실로 돌아온 것 같다. 추운 겨울 라이딩을 하지 못하는 갑갑함에 해묵은 스트레스를 털어내고자 떠났던 오키나와 바이크 투어는 계획대로 된게 거의 없었다. 길고 작은 여행길에 올랐지만 이번처럼 스펙타클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어떻게든 여정을 잘 극복해낸 나와 아내에게 감사한다.
추운 나라 파주에 돌아왔다. 어제 밤 폭설이 또 왔다고 한다. 수북히 쌓인 눈과 얼음이 그득한 앞마당을 지나 먼지 쌓인 차고에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바이크들을 보니, 음, 오키나와 다녀오길 딱 잘했다는 생각이 확 든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