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기장을 잃어버렸어."
"어디서?"
"아마 시민대학이거나 도서관이겠지."
"일기장을 집에서 쓰지 왜 들고 다녀."
"그러게, 추석 때 아들들 오니까 방 비워준다고 일기장도 챙겼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네."
한 달 전에는 파카 볼펜을 잃어버렸고, 찾지 못해 새로 샀다. '흠, 이번에 일기장만 다시 찾으면 다시는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겠어.' 바보들은 결심만 한다더니 공허한 결의만 머릿속을 맴돈다.
먼저 서울시민대학에 갔다. 2층 직원분에게 분실물 중에 혹시 노트가 있는지 물어보니, 없다고 한다. 다행히 지난번 파카 볼펜 잃어버렸을 때랑 다른 분이 2층을 지키고 있어서 그나마 덜 창피했다. 도서관에도 갔다. 역시 찾을 수 없었다.
"기쁜 소식이야. 일기장 찾았어."
"어디서?"
"응, 그게 방구석에 다른 종이 더미 밑에서."
"어이구, 일기장 잘 간직해 둬. 혹시 알아? 아버님처럼 손주들이 유물로 남겨진 자기 일기장을 보게 될지?"
아버지는 일기장을 남기셨다. 꼼꼼히 읽어보지는 않았는데, 인지력이 약해질까 봐 일상을 기록하셨던 듯하다.
"아, 일기장 말고 내 유튜브 영상을 봐. 내 채널 조회수도 올라가고 좋잖아. 허허."
"유튜브? 쳇, 그 등산 영상들? 호호, 그거 좋네. 제사 대신 영상 보기."
"영상을 볼 필요도 없어. 기일 때 내 유튜브 영상 틀어만 놔.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들끼리 살아가는 이야기 하고, 맛난 거 먹으면서."
일기장 분실을 계기로 유언을 남긴 셈이 됐다.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표현했지만, 가족이 나 때문에 상실의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나야말로 나에게만 집중하며 살았으니까, 가족들은 본인들에게 집중하며 살면 된다.
대학 시절에 한강에서 죽을 뻔한 적이 있다. 몸으로 하는 운동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여름 장마철에 흑석동 한강 한가운데서 사고를 당했다. 그 자리에서 가만히 구조를 기다려야 했는데, 성급한 나는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당시 한강에 빠지면 익사하는 게 아니라 배속이 오염돼 죽는다는 말이 돌 정도로 한강 물은 더러웠다. 처음엔 더러운 물이 얼굴에 닿지 않도록 고개를 들고 개구리헤엄을 쳤다. 장마로 인해 물살이 셌고 아무리 헤엄을 쳐도 한강 변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순간 이대로 죽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저 멀리 한강 변에 사람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죽음을 받아들였다. 힘을 빼고 고개도 물속으로 넣어가며 천천히 수영했다. 마음이 오히려 차분해졌다. '난 수영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자 어느새 한강 변이 가까워졌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특이한 건, 내 생을 정리하는데 30초 정도 걸렸다는 거다. 30초면 나를 움켜쥐고 있던 에고가 풀어지면서 사방이 고요해진다. 뭔가를 준비하려는 것처럼.
회사원 시절 자전거 타러 나갔다가 어깨뼈가 크게 부러지고 부서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날은 공휴일이라 모처럼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오전에 아내가 애들을 데리고 외출을 했다.
'휴일을 집구석에서 낭비할 수 없지.' 그새를 못 참고 자전거를 타고 운중천과 탄천을 따라 서울공항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집으로 달렸다.
"빨리 집에 와! 밥 식어."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가 짜증을 내며 전화를 했다.
속도를 좀 더 내서 동판교 다리 밑을 지나던 중에, 바람에 내 모자가 벗겨지려고 했다. 모자를 잡으려고 반사적으로 움찔하는 찰나의 순간에 자전거는 옆으로 엎어졌다. 내 어깨로 바닥을 치며 크게 나뒹굴었다.
나는 단 세 통의 전화로 삶을 정리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사고를 알리고 구조를 요청했고, 회사에 전화 걸어 나 대신에 내 역할을 해 줄 것을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전화 걸어 병원 치료 때문에 당분간 방문을 못한다는 상황을 알렸다. 회사원과 아들이라는 역할에서 벗어나자 뭔가 자유로워졌다.
분당 제생병원에 입원해 부서진 어깨뼈를 철심으로 다시 짜 맞추는 수술을 하게 됐다. 입원 병동과 외과 수술 병동은 꽤 떨어져 있었다. 수술받으러 이동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동식 침대로 옮겨 눕자 가죽 시트의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 몸은 얇고 하얀 천으로 덮어졌다. 덩커덩 거리며 구르는 바퀴 소리와 함께 긴 복도를 지나야 했다. 보이는 건 휙 휙 지나가는 형광등뿐이었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다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마침내 냉동실 같은 수술실에 도착했다. 쇠붙이들 부딪히는 소리, 방금 전에 먹은 점심 메뉴를 이야기하는 젊은 의사들 목소리, 그리고 전신 마취 한다는 통보. 그 마법 같은 주문이 실행되자 내 의식은 바로 '블랙아웃' 됐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됐고, 회사원 그리고 아들로서의 일상도 회복됐다. 어깨에 철심을 박고 지내는 일 년 동안에는 수영도 못했다. 오로지 걷는 운동, 산책만 했다. 사고 당시를 회고해 보면,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내가 그저 쉬고 있는 줄로 알았을 거다. 회사 사람들은 내가 휴가 다녀온 줄로 알았다. 제생병원에서 경험은 흡사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유사 죽음 체험이었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고, 잘 이해되지 않는 소리가 들렸고, 앞뒤는 보이지 않고 위만 보였다. 촉감은 온통 차가움 뿐이었다.
은퇴 후 다시 수영을 시작했다. 내 수영은 천천히 오래 하는 할아버지 수영이다. 25미터 길이 수영장이지만 수영할 때 빨리 가려하지 않는다. 물을 가르는 촉감, 찰랑거리는 물소리, 수경으로 보이는 모습들. 느껴지는 것들에 집중하며 수영한다.
죽음을 미리 생각하고 싶지 않다. 오늘 하루에 집중하며 살고 싶다. 하루하루를 정산해 가며 아무것도 남기지도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지내고 싶다. 매일매일 비용처리, 부채상환, 수익배분 해가며 언제든 청산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는 삶의 방식. '일상의 회계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ChatGpt는 아래와 같이 이 글을 해석하고 관련 문구를 찾아줬다.
이 글은 죽음에 대해 미리 걱정하거나 준비하지 않고, 하루하루의 삶에 집중하며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합니다. 여기서 "일상의 회계학"이라는 비유는 마치 회계사가 매일의 재정 상태를 정리하고 정산하듯이, 자신의 삶도 매일매일을 돌아보고 정리해 나가는 방식으로 살아가겠다는 뜻입니다.
특히, "비용처리", "부채상환", "수익배분" 같은 용어들은 삶에서 일어나는 경험들을 회계의 과정에 빗댄 것입니다. 즉, 하루하루 겪는 감정이나 일들을 즉시 처리하고, 미련이나 후회 없이, 빚진 감정도 남기지 않고 정리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삶을 미리 계산하거나 미래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면서 언제든지 정리하고 떠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철학적인 태도입니다.
1. 헨리 데이비드 소로 - 월든 (Walden)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자연 속에서 단순한 삶을 실천하며, 매일의 삶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정산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경험을 나눕니다. 그는 인간의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의 문장 중 비슷한 느낌을 주는 구절은:
"나는 나의 삶을 의도적으로 살고자 했고, 삶의 본질만을 마주하고 싶었다. 불필요한 부분은 모두 제거하고, 내가 직면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소로는 일종의 ‘삶의 회계학’을 실천하며,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벗어나 현재에만 집중하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2.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 몰입: 최고의 경험 (Flow)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flow)'이라는 개념을 통해,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고, 순간에 깊이 집중하는 삶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활동을 통해, 매 순간을 완전히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삶의 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삶은 순간순간의 흐름 속에 있다. 우리가 몰입하여 살아가는 매 순간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충분하다."
이러한 철학은 문구에서 제시하는 '매일의 정산'을 연상시키는, 삶에 대한 회계적 접근과 유사합니다.
3.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 삶의 지혜 (The Wisdom of Life)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매우 철학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을 제시합니다. 그는 물질적인 목표나 미래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 하루하루를 간소하게 정리하고, 현재를 온전히 살아내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삶의 매 순간을 주의 깊게 살아간다. 그는 미래의 희망이나 과거의 후회에 얽매이지 않고, 매일을 그 자체로 완성된 것으로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