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가끔은 따로 다니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그리고 저녁에 만나 서로의 모험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납품하러 가던 트럭에서 홀로 쇽 떨어진 걸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상처가 너무 없어.그럼, 장을 보고 가던 누군가 모르고 흘린 것일까, 아니, 저 크기를 모르고 흘릴 수 있나? 그렇다면 역시, 동화처럼 토끼가 무를 서리 하다가 들켜서 내려 놓고 도망친 건가!
길을 가다 뜬금없이 이 잘생긴 무를 발견한 것은 볼로냐에서 머문 지 3일째 되는 아침이었다.
“안녕, 잘 잤어? 정말 집에 가고 싶은 아침이다.”
무척 공감 되는 말에 빵-터지며 몸을 일으키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다. 목까지 부어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어제 하루 종일 고생하다 와 놓고, 제대로 쉬지 않은 탓이겠지.
(한참 아드레날린이 넘칠 때라 피곤한 걸 몰랐음)
식욕이 없지만 약을 먹기 위해 억지로 어제 사 온 과일과 요구르트를 먹었다. 집에 있을 때는 아프면 귀찮아서 약이고 뭐 고 그냥 굶고 자는데, 여행에 오면 다음 스케줄이 있으니까 억지로라도 챙겨 먹게 되는 것 같다.
잠시라도 걷고, 배고프면 먹고,..흠, 이렇게 평생 여행하면서 살면 100살까지도 살 수 있을 지도?
식사 후, 웅지는 볼로냐 아동 도서전 회장으로 떠났고, 나는 관심 있던 부스는 다 봤다 싶어, 재 방문은 관두고 좀 쉬다가 오후에 시내 관광이나 하기로 했다.
( 이따 만나서 저녁 먹자! /좋아! )
오전에 푹 쉬고 컨디션을 좀 회복하고 나니 어느새 1시, 외출 준비까지 하고 나니 2시가 되었다. 자, 이제 데이터를 충전하고 출발해볼까?
숙소에서 무료 WIFI 를 주긴 했지만 신호가 약하고 속도가 심각하게 느려서, 한참을 건물을 돌아다닌 끝에야 겨우 인터넷에 연결하고 10 파운드 (영국 통신사였음) 어치 데이터를 충전할 수 있었다. 껴두었던 데이터를 연결하니 띠링띠링하고 연속해서 밀린 문자와 카톡이 들어온다. 와, 이게 얼마만의 문명이야.
지금까지 여행기를 보신 분들은 2015년에도 구글 맵과 인터넷이 있었는데, 아무리 길치라고 해도 어찌 저렇게 헤맬 수 있을까? 하고 답답하게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며 나도 그랬으니까.
우리의 모든 방황은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가 아직 서로에 대해 그리고 이탈리아의 인터넷 속도에 대해 몰랐기 때문이었다.
(체감 상 10초에 몇 천원 씩 빠지는 느낌. 당시 환율을 생각하면 실제로도 그랬을 것 같다.)
인터넷 속도가 느리다더라 라는 말을 듣고는 왔지만, 생각보다 더 느렸던 속도에 미리 충전해온 데이터는 첫날 헤매는 와중에 다 녹아버렸다. 이번에도 또 순식간에 녹아 버릴 테지만 어쩔 수 없어. 왜냐하면 여러 번 다녀 본 길이라도 난 또 헤맬 자신이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조난해도 온기를 나눠 줄 웅지도 없이 나 혼자이고.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아 좋았던 볼로냐의 초 여름)
자, 그럼 박람회장 대신 어디를 가볼까? 두근거리며 지도를 키고 한동안의 기다림 끝에 지도가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박물관을 선택했다. 음, 버스로 37분 거리구나. 그런데 2번 갈아타고 또 걸어야 한다면,.. 너무 복잡한데? 앗, 벌써 3 파운드어치 데이터가 사라졌잖아! 무서운 속도로 줄어드는 데이터를 보며 생각했다.
- GPS를 계속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저 복잡한 루트로 가면 반드시 길을 헤맬 것이다.
- 다른 방문지를 찾기에는 데이터 낭비 속도가 너무 빠르다.
결론 : 조금 돌아가더라도 그나마 익숙한 센트럴 기차역 쪽으로 가서 버스를 타자. 거기에서는 모든 방향의 버스를 탈 수 있으니까 (아마도).
지도를 이미지로 저장한 후 (구글 지도 오프라인 저장에 대해 몰랐음), 웅지에게 행선지를 남기고 데이터를 껐다. 아, 그새 또 2파운드가 사라졌네. 이제 절반만 남은 건가.
(아까는 날씨가 좋게 느껴졌는데 두 시간 넘게 걸으니 안 좋아졌어..)
숙소 앞 정류장에서는 차내 티켓 판매를 하지 않는 버스만 오는 것 같았기에, 열심히 걸어 어제 버스를 탔던 정류장으로 이동했다(오늘 쓸 버스 티켓은 전날 사고로 미리 써버려서 티켓이 없었음).
하지만 목적 했던 버스는 운 나쁘게 타지 못했다. 다음 차를 기다릴 시간이 모자라서 그냥 센트럴 기차역까지 걷기로 결정. 그러고 보니 웅지도 티켓 없었을 텐데, 어떻게 했을까.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도 나처럼 걸어갔다고...)
아까까지는 그렇게 선선하게 느껴졌던 날씨가 도로를 한참 걷다 보니 이제는 뜨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직격으로 햇볕을 받은 머리는 점점 뜨거워지고, 2시간 가까이 걷다 보니 목은 마르고, 다리는 아프고.. 어제는 그래도 같이 웃으며 걸어서 힘든 줄 몰랐는데 말야. 반 쯤은 상황이 어이 없어서 나오는 웃음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웅지를 떠올리며 같이 걷던 길을 혼자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뭔가 하얗고 거대한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오늘 글 초반에 설명했던 그 무였다.
(같은 것 같지만 다른 사진입니다. )
한참 그늘에서 쭈그리고 앉아, 이 수상할 정도로 하얗고 예쁜 싱싱한 무가 어디서 왔을까 상상하며 쉬었더니, 어느새 체력이 회복되었고 기분도 나아졌다. 버스 안 타고 고생했더니, 덕분에 재밌는 것도 봤네!
이탈리아 여행 중, 생 무를 이런 길에서 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며 걷는데, 커다란 캐리어를 가진 여행객들이 계속해서 날 지나쳐갔다. 이 앞은 계속 도로 뿐인데 왜일까 했더니 우리 숙소의 이름과 이쪽이예요 라는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아무래도 그 표지판만 보고 숙소가 근거리에 있구나 라는 생각에 걸어가는 사람들인 모양. 진실을 말해주지 못한 미안함과 그들이 앞으로 겪을 고생에 대한 안쓰러움이 동시에 들었다. 힘내요, 빨리 걸으면 두 시간 까지는 안 걸릴거에요. 그래도 가다 보면 재미있는 무가 있으니, 그걸 보고 기운을 얻으시길!
과거와 현대가 잘 조합된 지금의 형태의 볼로냐를 만든 19세기 후반의 도시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에는 볼로냐는 유럽에서 몇 안되는 대규모 성벽 도시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대부분이 허물어졌지만 성문은 아직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답니다.
오랫동안 볼로냐를 보호해 왔던 시간들을 느껴보려면 그 성문들을 하나 씩 방문해보며 역사를 느껴보는 것도 좋겠지요. :-)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한참 걷다 보니 도심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센트럴 기차역에서 무사히 버스 표를 사고 목적 했던 박물관에 도착,
-했지만 못들어갔다. 왜냐하면 예약제니까!
볼로냐에서 일생을 보낸 화가, 조르지오 모란디 Giorgio Morandi (1890~1964)가 사용하던 작업실을 박물관으로 만든 곳인데, 아파트 내부에 있다 보니 실제 거주 중인 분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어서 주말에만, 그것도 사전 예약을 한 사람만 관광을 할 수 있었다. (무료) 그러니 무작정 온 나는 당연히 못 들어 갈 수 밖에.
(이미지 출처 : 모란디 하우스 공식 홈페이지/ Paolo Ferrari 촬영 사진)
( 아쉬운 마음만큼 흔들린 사진.. 다음에는 꼭.. )
어쩔 수 없지, 연약한 데이터와 예약 정보를 발견 못 한 내 잘못인 것을. 안타깝지만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침울한 마음으로 돌아서서 웅지를 만나러 센트럴 기차역으로 향했다.
별명 부자, 볼로냐의 별명 중 하나가 탑의 도시인 것을 알고 계시나요? 12세기~13세기 동안 지어진 탑들은 무려 180여개에 달했습니다. 지어진 이유는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가문의 부를 보여주기 위함과 침략의 공격과 방어를 위함이라는 가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탑들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파괴 및 철거되었고, 현재 24개의 탑 (출처 :위키피디아)만 남아 있습니다. 그 중 흥미로운 탑을 두 개 뽑자면, 단테의 지옥 등 여러 작가들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가리센다와 그 바로 옆에 서 있는 과학자들의 여러 실험에 사용되었던 아시넬리 일 것 같습니다. 두 가문의 재력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경쟁하듯 지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는 이 두 탑은 Two towers(Due torri) 라고 불리는 볼로냐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아래의 이미지는 탑이 잔뜩 있던 시절의 볼로냐입니다. 마치 높은 빌딩이 가득한 현대 도시 같죠?
(이미지 출처 :https://www.bellitalie.org/)
얼마나 걸었을까, 커다란 광장에 하얀 천막들이 길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뭘까 하고 다가갔더니 책 시장이었다. 반짝반짝 새 책부터, 상태 좋고 가격도 저렴한 헌 책, 그리고 책과 관련한 여러 상품까지, 다양한 것들이 잔뜩 있었다. 한참 구경을 하다 책 한 권을 사서 가슴에 품고 나오니, 박물관을 못 가서 서운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한 작가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덕분에 다른 한 작가를 만나게 된 셈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의 헛걸음도 영 나쁜 일이 아니었던 거지?
( 큰맘 먹고 그 구입한 책은 이탈리아의 화가 페렌츠 핀터 Ference Pinter 가 삽화를 그린 피노키오. 숙박비보다 비쌌지만 정말 가치 있는 소비였다! 그림도 물론 아름답고, 작가의 작업 방식을 기록한 페이지도 있어서 공부에도 도움된다. 추천. )
좋은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센트럴에서 조우한 웅지 덕에 현직 작가님들과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맛있는 음식도 먹어 볼 수 있는 행운 같은 일이 있었다.
아직 학생이었던 우리에겐 쉽게 없는 한국의 업계 선배들과 함께하는 귀중한 시간이었기에, 시종일관 눈을 반짝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 무슨 음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맛있고 멋있었다. )
그렇게 관광이라 할 관광은 못하고 실컷 걷기만 했지만, 열정 만은 가득 채우고, 볼로냐의 마지막 날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