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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ul 14. 2017

성석제 “소설은 불순해야 한다…독자 들어갈 틈 있어야”

저자 성석제 인터뷰 


“소설의 작은 기미, 펜촉처럼 날카롭고 단단한 이야기 앞에서 나는 특별히 더 긴장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고압선에서 튀는 불꽃같은, 서늘한 한줄기 바람처럼 흘러가고 벼락치듯 다가오는 우연과 찰나의 연쇄가 나를 흥분시킨다. 이야기라는 인간세의 보석에 나는 언제나 홀려 있을 것이다. 소설 쓰는 인간이다, 나는.” - 작가의 말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기 바쁜 각박한 시대, 이야기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배 꺼지니까 쓸데없이 말 많이 하지 말라”는 옛말도 있는 걸 보면, ‘이야기 무용론’이 비단 오늘날의 세태만은 아닌 듯하다. 먹고 사는 데 별로 보탬이 되어 보이지 않는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아니 이야기의 힘은 강력하다. 어쩌면 이야기는 인간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이야기꾼’ 성석제는 “인간은 진화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말을 인용하며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고, 인간은 어쩌면 이야기를 존속시키기 위한 도구”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마치 이야기를 번식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숙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듯, 짧은 소설, 중단편, 장편까지 종횡무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 성석제. 그 중에서도 그의 소설의 백미는 짧은 소설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인간 세상의 풍경을 꽉 움켜쥐고 손바닥만한 소설에 짧고 강렬하게 담아내는 그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최근 펴낸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2017/문학동네)에 실린 55편의 짧은 소설에서 그 압도적인 힘을 확인할 수 있다.


짧은 소설의 핵심… ‘단숨에 끝냈는가’와 ‘충격을 주었는가’

Q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은 이전에 출간됐던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2007)과 <인간적이다>(2010)의 일부 원고와 최근작까지 짧은 소설 55편이 실려 있는데요. 선별 기준이 궁금합니다.

당시 이야기를 쓸 때는 참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소비되거나 소모된 이야기들은 빼고, 오래 전에 썼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야기의 힘이 살아 있는 글들을 뽑았습니다. 예를 들어 ‘가오리’나 ‘따봉’ 같은 말들은 당시는 꽤 재미있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조각만 남은 사라진 언어죠. ‘이런 걸 왜 썼지?’ 하는 소설들은 가차 없이 빼는 거죠. 또 이런 짧은 소설들은 이야기를 듣거나 썼을 당시의 분위기, 기분 같은 거에 많이 좌우돼요. 그래서 책으로 다시 엮으려면 거의 다 버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변덕이 많이 작용하죠. 그런데 이런 변화가 작업을 재밌게 합니다.

Q 짧은 소설의 핵심은 분량이 아니라 ‘충분히 했는가’의 문제라고 하셨어요. 무슨 뜻인가요?

두 가지죠. 하나는 ‘단거리 경주할 때처럼 단숨에 완주를 해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짧고 강렬한 이야기라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그만한 충격을 주었는가’, 다시 말해 ‘내가 전하려고 했던 걸 온전하게 전해주고 있는가’ 하는 거죠. 쓸 때도 단숨에 쓰려고 합니다. 모니터 앞에 앉아서 키보드 자판에 손을 얹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습니다. 단숨에 잘 안 되고 딴 길로 돌아가고 늘어지기 시작하면 그른 겁니다.

Q SNS의 영향으로 짧은 소설이 각광받는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SNS가 없던 시절부터 짧은 소설을 써오신 작가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지금은 세계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긴 이야기는 안 읽히는 걸로 돼 있죠. 힘들어하고 귀찮아하고 그러니까. 나쁘게 말하자면 말단지엽적인 혹은 말초적인 것들에나 반응한다고 할까요.깊고 심원한 긴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죠. 짧은 이야기들도 존재 가치가 있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삶에 들어 있는 다양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죠. 저는 짧은 소설이 이런 글을 읽는 관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짧은 이야기가 긴 것을 기피하는 독자에게 소비되고 끝이라면 저나 독자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열혈독자였던 저의 20대를 생각해보면 그때도 수많은 형태의 읽을 것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이가 문제가 됐던 건 아닌 거 같아요.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을 보여주는가, 단초를 제공하고 문을 열어 보이는가가 관건이죠. 그게 아무리 길거나 짧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매력을 찾아냈던 거죠. 지금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긴 글이라도 그다지 지겹지 않고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울 정도의 이야기도 많아요. 작가들이라면 누구나 분량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 글을 쓰는 게 꿈일 겁니다.

Q 시인으로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다가 짧은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통해 소설가로 변신하셨습니다.

94년 여름, 지금까지도 가장 무더웠던 여름으로 기억되죠. 두 번째 시집의 원고를 정리하려고 신림동 고시촌에 한두 달 예정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날도 너무 덥고, 원고 작업이 전혀 안 되는 거예요. 차라리 놀자고 생각했죠.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시를 쓰면서 생긴 여러 가지 부산물들을 정리해보고 싶더라고요. 시는 경제적인 언어를 지향하다 보니 오래 쓰다보면 필연적으로 주변에 아까운 부산물들이 널려 있게 되거든요. 그걸 대개 많은 시인들은 버립니다. 저도 버릴 생각이었죠. 단지 묶어서 분리수거해 버리겠다고 생각한 거죠. 시가 안 되는 것들, 하지만 무엇인가 문학적인 풍미랄까 자상을 띠고 있는 언어들에 포인트를 맞춰 짧게 정리해가기 시작했죠.

날이 너무 더워서 긴 이야기는 쓸 수가 없었어요. 조금만 오래 붙들고 있으면 자판이 땀으로 젖어 미끄러울 정도였거든요. 아침에 일어나 땀나기 전에 한두 편 정리하고, 샤워하고 다시 한두 편 하고, 낮에는 구멍가게 같은 데서 맥주를 마시다가 저녁에 다시 하는 식으로 하루에 한두 편. 잘되면 서너 편, 어떤 것들은 원고지 30매, 어떤 것은 한 장씩, 분량이든 뭐든 전혀 구애받지 않고 썼어요. 썼다기보다는 버리려고 정리를 한 거죠. 그렇게 정리한 게 책 한 권 분량이 돼서 출간하게 됐어요. 출간할 때 이름 뒤에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는데 별로 개의치 않았어요. 소설이든 뭐든 앞으로 시나 잘 쓰면 되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 소설 청탁만 들어와 오늘날 이렇게 된 거죠.

Q “내 안의 산문적인 것을 다 털어내면 시만 남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산문을 쓴 게 소설의 시초였는데, 의도가 불순했다고 봐도 되겠네요.(웃음)

불순한 것을 드러내서 제거하려고 한 거죠.(웃음) 그런데 문학이란 특히 소설은 불순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고기 못산다는 말도 있듯이, 소설은 너무 맑으면 안 돼요. 사람이나 독자가 들어갈 틈이 없어져요. 시는 고독한 외침일 수 있지만 소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소설은 이야기이고, 일종의 대화 같은 것인데 그걸 순전히 자기만 알아듣는 언어로 자기 이야기만 하다보면 상대는 이해할 수 없죠. 상대가 이해할 만한, 어떻게 생각하면 불순하기도 하고 잡스럽기도 한, 서로가 소통할 여지가 있는 사물, 감정, 생각 이런 것들이 들어가 있어야 해요. 이런 걸 다 뭉뚱그려 개연성이라고 하죠. 개연성이 없으면 소설은 불가능한데, 개연성은 불순하다고 할 수 있는 거죠.

Q 소설은 궁극적으로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나요?

소설이 서사인가, 묘사인가는 오래된 논쟁이죠. 묘사적인 요소가 많은 소설에서 이야기는 중요한 게 아니죠. 이야기의 흐름을 중시하고 이야기가 갖고 있는 힘을 타고 서핑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디테일을 좋아하고 그것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죠. 이런 소설도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의 비참함이나 영웅적인 삶 같은 서사를 중요시하고 시대성을 담고자 하는 사람이 있죠. 어떨 땐 이렇고, 어떨 땐 저런 건데, 둘 다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저는 아무래도 서사 쪽에 관심이 많고 그렇게 쓰는 게 더 편합니다.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인간은 이야기 존속시키기 위한 존재”

Q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이라는 제목은 니체의 저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제목에서 따온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인간적인 것’은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그런 삶을 현실에서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죠. 인간이란 다채롭고 복잡미묘한 존재이고요. 어떤 점에서는 한없이 신에 가까운가 하면 어떤 때는 남을 증오하고 구렁에 빠트리는 악마성까지 가진 게 인간이죠. 그 널뛰기가 심할수록 재미있습니다.

Q 보통은 착하고 순박한 사람들을 가리켜 인간적이라고 하는데요.

그런 사람은 존재하기 힘듭니다. 과장이겠죠.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죠. 좋은 조상 만나서 손에 물 안 묻히고 살았으면 모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설하기조차 끔찍한 생각과 경험들을 갖고 있죠. 어디선가는 종교 이름으로 학살이 자행되고, 애들이 배타고 오다가 빠져죽기도 하고요. 그런 비참함까지 다 포함된 게 이 세계이고 이 세계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이 세상에 영웅만 있다면 영웅이 누구랑 싸우겠어요. 또 한 사람에게도 그런 양면성이 동시에 구유(具有)돼 있다고 봐야 되고요. 그러니까 문학 작품을 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거죠.

Q 오래전부터 ‘이야기꾼’이라 불리고 있는데, 좀 지겹지는 않은가요?(웃음) 혹시 다른 호칭으로 불리고 싶은 게 있으신지요?

소설 쓰는 사람인데 싫어할 순 없죠. 영광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다른 호칭으로 불리고 싶다면, ‘떼부자’? 가능성은 없지만 이런 거로 불리고 싶긴 하네요.(웃음) 작가로서, 이걸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동경을 가진 적은 있습니다. ‘음유시인’요. 시를 짓고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숙식을 제공받는 그런 사람들에게 동경심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직업이죠. 우리나라에는 김삿갓이 있었죠. 랭보도 비슷한 시절이 있었고요. 아르헨티나에도 있었고, 알타이 산맥 마을에도 현존하는 음유시인이 있습니다. 돈만 되면 나도 하고 싶어요.(웃음)

그런 사람들이 노래만 잘 부르는 게 아니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야만 딴 데 가서 밑천으로 장사를 하죠. 저도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는데, 그게 소설의 형태인 거죠. 저는 이게 체질에 맞는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저한테 해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동네 형들이나 윗사람들이 사는 데 아무런 보탬이 안 되는 엉뚱한 픽션을 이야기해줘요. 동네 전설이라고 하는데, 다 거짓말이에요. 이야기 들어주고. 재밌게 잘 듣다보면 집에 있는 고구마도 주고, 아끼는 구슬까지 줘가면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 경험들이 나중에 소설을 쓰게 한 밑천이 된 것 같습니다.

Q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아하지만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는 듯해요.

네. 그렇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어요. 리처드 도킨스가 “유전자가 인간을 진화하기 위한 운반체로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저는 이야기가 사람과 문명과 역사를 운반체로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 인간이 거꾸로 이야기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이야기라는 건 무용해 보이죠. 어른들이 예전에 ‘배 꺼지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빨리 자고 일할 생각해야지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고 혼내고, 소설책 읽는 것도 나무라고 그랬어요. 그래도 이야기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회적 공동체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한 허구적인 이야기는 꼭 필요하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를 보면 훨씬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겁니다.

Q 워낙 바쁘게 살다보니 소설 읽는 게 효용성 떨어지고 시간이 아깝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읽으면 됩니다. 안 읽어도 당장 사는 데 큰 문제 없어요. 우리가 비타민이나 식이섬유 먹지 않는다고 당장 죽는 건 아니거든요. 인스턴트 음식만 먹어도 별 문제 없고요. 아무것도 안 하고 티비만 봐도 큰일 나지 않아요. 하지만 지나다 보면 어느 순간은 지금까지 내가 뭐했나 싶을 때가 있겠죠. 되돌릴 수 없게 퇴행하기도 하고요. 자기계발서 읽는 것보다 소설을 읽는 게 훨씬 더 인간을 향상시키고 리프레시하고 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은 죽을 때까지도 남아 있고요.

Q 재미있는 글을 쓰는 작가이기 때문에 실제로도 재미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요.

재미있다는 건 상대적인 것 같습니다. 저는 듣는 게 편하고 즐거워요. 돈을 아주 많이 준다면 모를까 어떤 자리에 가서 억지로 없는 이야기 하려고 하면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어요. 서로 재미가 없죠. 물론 돈을 많이 주면 당연히 재미있습니다.(웃음) 기회가 되면 꼭 말을 하려고 했는데, 제 이야기가 재미있기를 바라면 출연료를 많이 주시면 됩니다.(웃음)

이런 출연료와 상관없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저는 재미가 없는 편이에요. 친구들이 이야기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해요. 친구들이 원고료 줄 것도 아닌데 재미있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고요. 그런데 듣고 있으면 또 재미있어요.

저는 반응이 좋아요. 잘 웃는 사람이에요. 저희끼리는 이야기하고 서로 잘 웃지도 않는데, 잘 웃고 맞장구 쳐주는 제가 있으면 분위기가 그렇게 화기애애해질 수가 없어요. 결론은 재미는 상대적이라는 말씀, 재미있어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에게 재미있게 해줄 사람이 생긴다는 겁니다. 기자분들도 저한테 와서 재미있기를 기대하면, 인터뷰료를 좀 주고 시작하면 됩니다.(웃음)



글 : 이미회(북DB 객원기자)
사진 : 임준형(러브모멘트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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