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처럼

by 민콰이엉

뇌졸중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나는 감사하게도 가족들의 지지만큼은 충분히 받았던 것 같다. 내가 입원해 있을 때부터 남편과 양가 가족들은 나의 빈자리를 채워 주고 나의 회복을 위해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뇌졸중은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아이들은 위로하려고 하지 않는데도 가장 큰 위안이 된다. 어떤 면에서는 어른들이 전하는 위안과 덕담보다 위력이 큰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날 샤워를 하고 선풍기 바람에 머리를 말리며 기도하다 눈물이 흘렀을 때였다.


"엄마 우려?"


4살짜리 둘째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연민이 아닌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엄마 눙물 따까 줄게~"


다정한 목소리와 상반되는 터프한 손놀림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생각지 못한 과격한 위로(?)에 눈물이 쏙 들어가고 웃음이 났다.


"엄마 나도 닦아 줄게!"


9살 첫째도 엄마 눈물 닦기 놀이(?)에 합세한다. 엄마한테 달려드는 아이들의 얼굴이 참 해맑다. 그렇다 나는 아직 40살이고 아이들은 고작 4살, 9살이다. 살아갈 날이 많다. 그리고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첫째가 그린 그날의 그림

어느 날은 외출해서 가족끼리 카페에 갔다. 올해 불면증으로 잠을 못 자기 시작하면서 가끔씩 내가 현실과 유리된 불안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때도 묘한 이질감이 몰려와 현실의 감각을 붙잡으려 황급히 첫째의 얼굴에 집중해 보았다.


"규홍아, 규홍이는 언제 가장 행복해?"

"음.. "

첫째가 좀 생각했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


순간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내가 아프면 첫째의 행복한 순간을 지켜 주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첫째의 행복을 위해 나 자신을 회복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때로는 나 자신보다 가족이 더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것을 느꼈다.


한편, 가족들은 강력하게 전문적인 재활을 권했다. 나는 경증이어서 오히려 재활을 받으러 다니기가 어려웠다. 대부분의 뇌졸중 환자는 입원을 해서 재활을 받기 때문에 뇌졸중 전문 재활 병원은 외래 진료를 하지 않거나 진료 대기가 아주 길었다.


나는 수소문 끝에 다행히도 집 근처 정형외과에서 재활을 받게 되었다. 뇌졸중 환자를 많이 치료해 본 선생님이셨다. 재활 선생님은 걷기 연습과 재활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운동을 알려 주셨다.


일상적으로 했던 걷기라는 동작을 다시 배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선생님은 걷는 동작을 여러 단계로 세분화해서 과장된 큰 동작을 해 보도록 연습시켰다. 너무 당연하게 의식 없이 했던 동작을 하나하나 의식해서 하려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일단 선생님의 지시를 해석해서 나의 몸에 전달하는 것부터가 도전이었다. 왼발을 앞으로 딛고 오른발 뒤꿈치를 띄우며 무게 중심을 이동하고... 그때 팔은 다리와 반대로 움직여야 했다. 겨우 지시를 이해하여 팔을 제대로 해보려고 하면 다리가 말썽이고 다리를 정확하게 움직이면 팔이 갈 곳을 잃는 식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천천히 걷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불현듯 발바닥에 땅의 느낌이 전해져 왔다.


'이걸 딛어야 해!'


재활에서 선생님이 수없이 말하셔도 알 수 없었던 발바닥을 딛어야 한다는 감각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오른 다리에 힘을 주어 바닥을 밀어내었고 나는 조금 위로 올라갔다. 걸음마를 처음 시작해 신난 아이처럼 즐거웠다. 지지부진하게 느껴지던 걷기 재활도 조금씩 진전되었다. 오른 다리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고 걷는 것도 점차 자연스러워졌다.


어떤 날은 살짝 뛰어보기도 했다. 감격스럽게도 가능한 일이었다. 가족과 산책하며 남편과 아이들에게 "이것 봐? 나 뛸 수도 있어!"라며 마치 걸음마를 처음 뗀 아이처럼 자랑했다. 아이들도 신이 나서 같이 공원 길을 내달렸다. 몇 미터 안 가서 헉헉대며 주저앉았지만 말이다.

2~3개월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재활 선생님이 해 주신 여러 가지 말씀들이 기억에 남았다.

"30대 이후에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게 당연하다. 그걸 잘 받아들여야 한다"
"증상에 비해 너무 불안해 보인다"
"내 인생에서는 남편도 아이도 1번이 아니다. 내가 1번이다."

생각해 보면 선생님의 조언은 내 몸보다는 마음을 향한 것들이었다. 어쩌면 나는 몸보다 마음의 재활이 더 시급한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나는 잘 자지 못했다. 어느덧 여름은 저물고 가을 초입 무렵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몸의 재활은 끝났고, 아직 나에겐 마음의 재활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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