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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May 02. 2016

사랑과 현실

그녀가 남자를 만난 건 작년 봄 무렵이었다.

남자는 여자가 자주 가는 동네 레스토랑의 사장이었다자주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다.

어느 날은 예약을 하기 위해 레스토랑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영업 시간 전이다 보니 연결되어 있던 사장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갔고 

그렇게 서로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여자는 그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 전에 남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사장님내일 저녁 7 2명 예약 가능할까요

사장님오늘 저녁 7시 반 4명 부탁요

사장님다음주 목요일 6시 반 3!


한 달이 지날 무렵,

여자는 퇴근 후 직장 동료들과 고기에 술 한잔을 하고 있었다

남자로부터 문자가 왔다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문자가 온 지 10분 뒤에나 확인을 했던 여자는 갸웃하며 남자에게 전화를 했다.

사장님 무슨 일이세요?

아 다름이 아니라 뭐 부탁 좀 드릴려구요

제가 이번에 저희 본사로 한동안 출근하기로 해서 

각종 문서 양식이 필요할 것 같은데 제 주변엔 죄다 장사하는 놈들이라 딱히 부탁드릴 곳이 없어서

아 네뭐 어떤 문서들이 필요하신 건지

보고서나 제안서인력관리 문서 같은 거요일단 주실 수 있는 대로 주세요.

아 네 이번 주까지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 드릴께요문자로 메일주소 보내주세요.

이렇게 예약이 아닌 용건으로 그들은 통화를 하게 되었고

남자는 도움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저녁을 사기로 했다.

일요일 저녁 그들은 분위기 있는 식사가 아닌 눅눅한 한 해물 전용 이자카야에서 술을 마셨다.

그들은 말이 잘 통했고 많이 웃었으며 즐거웠다

그리고 술김에 손을 잡고 걸었으며남자는 여자를 집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이후로도 

양재동에 오겹살 맛있는 데가 있다더라."

"세관사거리에 문어숙회 죽이는 데가 있다더라다음에 거기 가보지 않겠느냐등의 소재로 

다음 약속을 자연스럽게 잡았고설레는 데이트를 이어 나갔다

그들은 비슷한 유머코드와 관심사로 급격하게 친해졌고일주일에 한두 번은 만나게 되었다

어느 날씨가 화창한 날은 함께 서울 근교로 드라이브를 갔다 왔고 

반나절 넘게 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헤어지기가 아쉬워 

압구정 오징어 횟집에서 소주 한잔만 더 하고 가자 했다.

여자는 행복과 술기운에 취해 얼굴이 발개져있었고 남자는 뭔가 그날따라 어색하게 행동했다

그러다가 남자가 말을 꺼낸다.


사실 너에게 할 말이 있어이 말을 하기까지 용기가 많이 필요했고 

다시 널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 하는 거야

여자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속으로 전 여자친구랑 아직 헤어지는 단계인건가그만 만나자는 건가?

짧은 몇 초간에 여자는 최대한 자신의 방어기제를 발휘하여 

자신이 충격을 받지 않게끔 상상력을 발휘하려 노력 중이었다.


나 사실돌싱이야이제서야 말해서 미안해.

우리가 이렇게 잘될지도 몰랐고 말할 타이밍을 계속 놓쳤어.

여자는 생각했다

뭐 이 정도면 괜찮아좀 놀랍긴 하지만 충격은 아니야.


그때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딸도 있어… 전 와이프가 키우고 있고 8살이야.

술이 확 깬 여자.

이 남자와 결혼을 약속한 것도 아니고 만난 지 2개월이 채 안되었지만 

왠지 모를 실망감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지금 고백을 해준 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앞섰다.


너무 늦지 않게 얘기해줘서 고마워요생각 좀 해볼게요.


  2주 간의 깊은 고민 끝에 그녀는 남자를 계속 만나기로 했다

나이가 있어 결혼도 고려하고 만나야 했고

솔직히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상황이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관계를 계속하기로 했다

이유는 남자가 좋았기 때문이다좋았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일단 한번 가보자고.

자신의 감정에 따르기로 했다.

적어도 남자의 과거의 실수 때문에 만남 자체를 거부하는 건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했다.


기왕 만나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면 내가 유리한 갑을관계는 만들지 않으리라,

보상받고 싶어할 자신의 욕심을 반드시 내려놓으리라 다짐하며 말이다.

그들은 서로의 약점을 드러내고 받아들이기로 한 이후로 더욱 사랑이 깊어졌고

잘 맞는 연인이 되었다

여행을 가고주변 지인들에게 서로를 소개시켜주었으며섹스를 했고싸우기도 했다


처음에는 걱정과 염려를 마음 속 깊이 묻어두고 용감한 선택을 했던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그와 함께 하는 시간추억들이 늘어났고 사랑은 깊어졌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번뇌했고 고민이 깊어갔다.


그렇게 그들이 만난 지 9개월쯤.

그들은 예상하지도 못한 계기로 헤어지게 되었다.

남자가 사업 상 단란주점을 갔고 술집 여자들과 문자를 주고 받은 걸 여자는 용서하지 않았다.

둘은 헤어졌고 그 이후로 두 번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와 이런 일로 헤어질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를 사랑하기에 어려운 현실을 함께 헤쳐 나가보려 했는데 

이 남자가 모든 것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남자로 인해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했고 

모든 원인을 남자에게 돌렸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고 여자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남자친구는 있냐고 물어본다.

어느 정도 마음이 추스르게 됐던 여자는 그 남자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를 했다.

이러이러한 일들이 있었다고.

내가 이런 상황까지 감안하고 사귀고 있었는데 

결국 나한테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상처를 줘서 헤어지게 됐다고.


그때 그 친구가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그 사람이 잘못한 건 맞지만결국 헤어지는 상황은 니가 혹시 원했던 거 아니야?”


 친구의 말인즉슨그 남자를 신뢰하지 못하고 휴대폰을 본 것

그리고 잘못을 들추어 집요하게 싸웠던 것

앞으로 어떻게 해결할 지가 아니라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에 중점을 둔 것.

용서하지 못한 것.


마음 속 깊은 곳에 사실은 예전부터 그 남자와 헤어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그 계기를 그 사건으로 활용한 건 아니냐는 거지


여자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이지만 자신도 잘 모르던 그 실체를 들킨 것만 같았다.


어쩌면 여자는 남자를 좋아했지만 결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어떤 외부적인 계기가 그 둘을 갈라놓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명분이 필요했고 마침 딱 알맞은 명분을 찾아 

고통스러운 이별을 자처했는지도 모른다

사건의 잘잘못을 떠나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결혼을 하면 사랑보다 지극히 현실이라며 기혼자들은 말은 한다.

하지만 결혼을 하기 전에도 우리는 결혼을 전제하든 전제하지 않던 

다양한 모습으로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사랑이 감정이라면 현실은 이성일까.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게 정답이라고 하면서 

누군가는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으로 감정을 억누르기도 한다

이성적인 판단이 미래의 행복을 보장하는 건 아니지만 성공의 확률을 높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성적으로는 아닌 걸 알면서도 

마음이 따르는 대로 선택행동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래서 친한 친구에게 나에게 정신차리라고 말해줄래?”라고 말할 때도 있다.

감정이 이끄는 선택이든 이성적으로 판단한 선택이든 우리는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고,

실패확률을 낮추기 바란다두렵기 때문이다.


여자는 아마도 남자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가장한 감정과 

내면에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하는 이성이 싸우는 그 시간들을 버티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이렇듯 우리는 어떠한 하나의 사건 때문에 이별을 하기 보다 

자신의 내면이 만들어내는 수 없는 갈등에 마음이 지쳐서 포기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가 왜 그 사람과 헤어졌는지 정확하게 기억조차 나지 않을 때가 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헤어지게 된 계기와 사건은 기억나지만 

그게 헤어질 정도였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건 아마 그 결정적인 사건이나 계기 때문도 아니고,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속이 좁고 모질어서도 아니고, 

그 당시 나의 감정과 두려움이 많이 싸우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게 너무 지쳐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만났던 사람보다 

더 사랑하고 더 매력적인 그 누군가를 찾기 보다

현실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덜 느껴질 그 누군가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마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닭인지

선물같은 그 사람을 만나는 게 달걀인지

어떤 것이 먼저 되어야 하는지 아직도 난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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