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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Mar 28. 2021

오늘 밤엔 어디서 자지?

허머스, 바다, 그리고 사막: 이스라엘 내셔널 트레일 1,000km 4


“이 가시덤불 길의 끝까지 갔는데 도로로 안 이어지면, 그냥 그 자리에 멈춰서서 굶어 죽어 버릴 거야.”    

  

가시덤불 사이에 선 D가 숨을 씩씩거린다. 저기…. 머리에 잔뜩 붙은 가시나 좀 떼고 말씀 하시지요…. 나 역시 가시가 잔뜩 붙은 D의 뒤통수를 보며 가시덤불 사이를 걷고 있다. 가시를 발로 밟고, 양 손으로 쳐 내면서 걸어보지만 팔이 긁힌다. 바지와 머리카락에도 달라붙는다.  




눈을 떴다. 옅은 카키색의 텐트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물 생각이 났다. 물병에는 물이 두 모금 남아있다. D와 한 모금씩 나눠 마시고 길을 나섰다. 빵이 조금 있었지만, 목이 더 마를까봐 먹지 못했다. 목이 마르다. 허기도 진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종이처럼 출렁거리는 상체를 어떻게든 곧게 세우며 천천히 걸었다. 길 왼편으로 거대한 키리앗 쉬모나의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데. 저 곳에 물을 파는 상점과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얼마나 많을 텐데. 바라만 볼 뿐 다가갈 수 없는 물이여.... 걷자. 물을 구하려면 일단, 걸어야 한다.


키리아 시모나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시내에 도착하려면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걷고 걸어야한다.


“제기랄, 젠장.”      


핸드폰 지도를 보며 길을 앞장서 걷던 내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2시간을 열심히 걸었는데. 이 쯤 걸으면 마을이 나올 줄 알았는데. 트레일은 산길로만 하염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물을 구하려면 트레일을 벗어나야하는데…. 길이 마을로 빠져야 하는데…. 지도를 다시 노려봤다. 다행히 머지않은 곳에 도로가 있다. 한 시간을 더 걸어 도로 근처까지 갔다. 그리고 이렇게, 가시덤불이 우리를 가로막아 버렸다.      


도로와 산 사이에 위치한 농장이 범인이다. 농장을 가로지르면 도로로 나갈 수 있지만, 농장이 철조망으로 싸여 들어갈 수 없다. 농장 옆으로 난 가시덤불 숲만이 길이다. 어쩔 수 없다. 당장에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을 지경이니,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는 수밖에.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빽빽한 가시나무 숲 속으로 몸을 던졌다. 수풀을 헤치며, 얼굴과 팔과 다리를 무지막지하게 긁혀가며. 이따금 가시에 피부를 긁혀 내지르는 비명 소리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해가며.     


가시나무 숲에서 약 30분을 헤엄치고 나니 끝이 나왔다. 그 끝은 높은 철조망이었다.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다. 갈증은 우리를 강하게 한다. 철조망 담을 넘어, 또 다시 나타난 가시나무 숲을 가로질러, 영광의 도로로 탈출했다.   


당장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을 지경이니, 얼굴이 긁히든 말든 가시덤불 따위 헤쳐나가야지.




도로를 따라 15분을 걸으니 이프타(Yiftah) 마을이다. 입구에 마을 안내 지도가 있다. 지도 상 마을 중심에 있다는 작은 마트를 향해 걸었다. 마트 옆에는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수도꼭지를 열어 물을 채웠다. 물통을 반병쯤 채워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들어가던 식물이 다시 피어나듯, 30 퍼센트 쯤 죽어 있다가 살아나는 느낌. 마트로 들어가 프레츨 과자와 우유, 웨하스, 구미베어 등, 구색과 조화는 안 맞지만 칼로리가 높은 것들을 사서 밖으로 나갔다. 벤치가 보이지 않아 바위에 대충 걸터앉아 음식을 게걸스레 삼켰다. 한참을 말없이 먹고 마시니 정신이 돌아왔다. 

 

우리를 구해준 이프타 마을 상점 입구

“뭔가 폭발한 모습이다.”      


처음보다 한참 느려진 속도로 구미베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D가 말했다. 우리가 걸터앉은 바위 앞 전방 2m. D의 말처럼 우리의 모든 것이 폭발한 것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대충 던져놓은 배낭. 앞 가방.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과자, 물통, 우유….  





세상이 다시 아름다워 보인다. 아니, 세상은 늘 아름다웠으나, 배가 부른 지금에야 그 아름다움이 인식된다고 해야 하나. 도로 저 편으로 꽃인지 풀인지 알 수 없는 보라색의 밭이 펼쳐져 있다. 그 옆에는 녹색 밭. 색의 조화가 끝내준다. 그 뒤로는 광활하고 황량한 산이 장황하게 서 있다. 방향으로 봐서는 저 너머가 시리아일 것 같다. 어제는 레바논을 보며 걸었는데.  


저 너머가 시리아겠지.


도로를 조금 걷다보니 다시 트레일이 나왔다. 트레일은 계곡 아래로 우리를 안내했다. 물이 마른 계곡길이다. 짧지만 암벽을 타야하는 구간도 통과했다. 조금 강해진 기분이 든다. 배낭을 메고 바위에 박힌 핸들을 잡고 오르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아, 세상은 아름답고 나는 강하고 배는 부르고 마실 물도 충분하고. 얼마나 좋은가.  


암벽길을 걸었다. 나는 강하고 배는 부르고 마실 물은 충분하고.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오늘 밤은 로못 나프탈리(Ramot Naftali) 마을에서 묵기로 했다. 트레커를 위해 마련된 공용 헛간이 있는 곳이다. 그제는 따뜻한 방, 어제는 야영, 오늘은 헛간. 내일은 어디서 자게 될까.   

   

“이 마을에도 상점이 있다.”

D가 마을 입구에 세워진 마을 안내 지도를 보더니 말했다. 뭘 살까? 허머스, 빵, 피클, 햄을 사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자. 레아가 해 준 거랑 똑같이 말야. 마을을 단숨에 가로질러 걸었다. 종일 들고 걸은 배낭이 무거운 줄도 모르겠다.     


“4시도 안됐는데….”  

D가 마트 앞 벤치에 털썩 걸터앉았다. 상점 문은 닫혀있었다. 너무나 실망스럽다. 금요일이 샤밧인 건 알았지만, 샤밧에는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는 것도 알았지만, 4시 전에 문을 닫을 줄은 몰랐다. 해 질 시간에 슬슬 닫는 건 줄 알았는데. 검색해보니 샤밧에는 오후 2시 3시면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단다. 설날이나 추석에도 문 여는 상점이 열에 하나는 있는 서울과는 다르다. (무슬림이 운영하는 상점이 아니라면)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씩…. 샤밧의 신이시여…. 왜…. 우리의 허머스 피클 샌드위치의 꿈을 앗아가나이까…. 


“아까 가시나무 숲을 헤쳐서 이프타 마을에 있는 상점에 들르길 천만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상점이 문을 다시 여는 내일 저녁까지 쫄쫄 굶을 뻔했잖아.”      


다행이긴 한데, 그래봤자 우리 손에 남아 있는 건 프레츨 과자와 초코 웨하스 정도다. 벤치에 앉아 과자를 씹어 먹다가 헛간으로 향했다. 초등학교 교실만한 공간 한 쪽에 더러운 매트리스가 쌓여있다. 그나마 깨끗한 매트리스 두 개를 골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침낭을 깔았다. 화장실에 가니 웬걸. 따뜻한 물도 나온다. 샤워도 하고 세수도 하고 이도 닦았다. 사람이 된 기분이다. 저녁은 제대로 못 먹었지만, 그래도 감사한 기분이 든다. 감사하게 잠에 들자. 그리고 내일 또 열심히 걷자.  


걷고 걸어, 나못 나프탈리에 도착했다.




"D야, 비가 온다." 

"어, 그러네." 

"꽤 많이 오는 것 같아." 

"만약에 트레일 엔젤이랑 연락이 안 돼서, 산에서 야영을 했다면 지금쯤 어쩌고 있었을까." 

"텐트 안에서 비가 샐까봐 걱정하며 벌벌 떨고 있었겠지."

"아까 가시덤불을 넘어 마을로 가지 않고 산길로 그대로 계속 걸었다며,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었을까."

"깊은 산 어딘가에 고꾸라져 인생을 저주하고 있었겠지." 

"다행이다. 이렇게 실내에서 잘 수 있어서." 

"어. 실내에 누워서 듣는 빗소리는 얼마나 듣기 좋은지. 야외에 있으면 공포인데." 

"손잡고 자자."

"그래."

      

D의 손. 빗소리 때문인지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샤밧: 유대교에서 지키는 1주 가운데 제7일(토요일). 금요일 해 질 녘부터 토요일 해 질 녘까지다. (이스라엘에서는 주말이 토일 대신 금토라고 생각하면 된다.) 샤밧에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상점도 열지 않고, 대중교통도 다니지 않는다. 운이 좋으면 아랍계 사람들이 운영하는 편의점 등을 만날 수 있지만..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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